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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지 Jul 31. 2023

002. 바다의 시작

  하수구 옆 노란색 차선 위엔 ‘바다의 시작’ 이라고 적혀있었다. 마치 그 하수구의 이름인 것처럼. 사방을 항상 이리저리 읽으며 걷는 습관으로 발견한 그 날의 수확이었다. 여기서부 터 바다가 시작되니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는 어느 공무원의 경고장인지는 몰라도, 거대하고 위대하며 아름다운 것의 태생은 언제나 미미하고 보잘 곳 없는 곳에서 시작된다는 예술가의 안내문 같았다. 그 공무원을 예술가라 생각해도 좋겠다. 의도가 어쨌든.


  이번 1월엔 거의 무주에서 지냈다. 침대 없는 방에서 3주간 중간이 없는 온돌바닥에서 지 져지고 식혀지며 잠을 청했다. 바닥에서 자는 것은 익숙했다. 깔고 잘 것이 이불 한 장이었 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룸메는 숙소가 이럴 줄 알았다며 두터운 요가메트를 하나 부르더 니 깔고 누웠다. 이정도로 뜨거우면 저거 녹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온돌이었다. 나는 그 온 도를 폭신함으로 삼고 그냥 매일 밤 달궈지며 자기로 했다.


  콜타임이 새벽이라면 스타렉스 앞창엔 분명 서리가 껴있을 것이다. 다음날 일정표를 보고 퇴근 담당 팀원에게서 차키를 미리 받아들고 방으로 들어간다. 한 장짜리 이불바닥에서 일 어난 출근 담당이 어제 받아둔 차키를 들고 출발 시간보다 10분 일찍 주차장으로 나간다. 서리를 미리 없애기 위함이다. 제 시간에 출발하기 위한 분투. 시동을 켜고 프론트 히터를 튼다. 앞창이 훤해질 때 쯤 이면 -물론 밖은 어둡고 서리만 사라진다- 그 날 촬영분 콘티도 다 읽고, 미리 켜둔 네비가 경로를 그대로 안내하겠다며 출발하지 않은 봉고를 재촉한다. 그 럼 하나 둘 차로 들어와 어우 소리를 내며 몸을 움츠리고 각자의 패딩 속에 뭍힌다. 전날의 과음과 아침의 추위와 누적된 고단함으로 농축된 소리를 들으며 사이드 브레이크를 내린다.


  괜찮은 날도 있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차를 대충 대고 다 같이 장비를 먼저 내린다. 짐을 다 내린 차는 지정된 곳에 주차해야 한다. 너 할 수 있겠어? 셋째가 하고 와라. 아냐 지이가 해. 괜찮겠어? 강하게 커야지 이런 말들이 오가고, 많은 이의 눈과 입으로 도움을 받으며 진창이라 바퀴가 헛도는 비탈진 진흙 바닥을 후진으로 빠져나와 오르막 외길을 올라갔다. 무주는 분명 눈이 많이 내릴 것으로 예 상했는데, 내가 느끼는 것은 추위가 아니라는 듯이 물은 얼지 않았다. 비가 와서 촬영을 잠 시 중단했다가 재개하는 횟수가 잦아졌다. 비가 오면 제작부가 펴둔 캐노피 안으로 장비들 을 먼저 다 집어넣고 몸을 구겨 넣는다. 바닥은 이미 흙 진창이다. 준 갯벌이 된 땅이 자꾸 만 발바닥을 잡아끌고, 모두가 첩첩 소리를 내며 걷게 만든다. 장비를 두는 것도 여간 곤란 한 게 아니다. 젖으면 안 되는 것들을 젖은 바닥에 내려둘 수 없으니 비닐로 하나씩 다 감 싸두는 번거로움. 젖은 흙바닥이 화면에 나오면 안 되니 흙을 파내고 커다란 방수포로 덮어 두는 수고스러움.


  진흙 범벅이 된 바지를 벗고, 방바닥에 바스락 거리는 마른 흙과 돌을 밟으며 분명 어제 잘 털었는데 하고 생각한다. 욕실로가 이불도 없이 잠자던 흙들을 턴다. 수챗구멍으로 흘러 들어가도 바다가 될 수 있겠지. 그리고 눈이 아닌 비로 내리겠지. 여기가 바다의 시작이겠 지. 흙은 그렇게 짐작하며 차키 어디 뒀더라 생각하다 홑이불 위에서 잠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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