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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혜진 Dec 23. 2021

비바람이 몰아치면

2021-06-03

학원에서 수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퍼붓는 비와 몰아치는 바람에 발걸음을 빨리 옮겼다. 우산이 곧 뒤집히기라도 할 것처럼 바들바들 떨려와 온 힘을 다해 바람과 맞섰다. 하늘에 있는 누군가가 나를 쥐고 뒤흔드는 것 같았다. 깜깜한 거리엔 나 홀로, 쉼 없이 내게 부딪히는 바람에 어째서인지 울고 싶어졌다. 어찌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이 날 이리저리 내모는 와중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최대한 빨리 발을 움직이며 바람이 잦아들길 바라는 것 뿐이었다. 


아파트로 들어오자 방금 전에 느꼈던 압도감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따뜻한 집 안에 도착하니 무시무시하던 비바람은 단순한 이야깃거리로 전락했다. 오랫동안 나를 쥐고 흔드는 것은 크게 휘몰아치는 비바람 같은 것이 아니다. 작은 말실수, 답이 없는 메시지, 잘못된 선택 같이 조그만 기억들이다. 평소에는 모습을 감추고 있다가 불쑥 튀어나와 심장에 꽁꽁 묶어 아래로, 아래로 끌어내린다. 


난 때로 내 존재의 일부를 떼어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놓는다. 그들이 나를 바라보고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때면 나의 조각이 그들 속에 잘 있는지 안부를 묻는다. 하지만 그 사람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대답이 돌아오지 않으면, 그때 난 떼어낸 조각만큼 무너진다. 다른 사람에게 기대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걸까. 다른 사람에게 나를 건네지 않고는 왜 견디지 못하는 걸까. 내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은 어쩐지 모순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다.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나의 흔적을 찾아낼 때면 기쁨 그 이상의 감정이 피어난다. 그들의 마음에 씨앗을 심어 놓고 무럭무럭 자라기를 기도하는 순간들이 억울한 마음을 따스하게 녹인다. 흔들리는 파도 속에서 내가 물 위를 걷기 위해서는 흩뿌려 놓은 내 조각들이 필요하다. 그들의 눈짓 하나에 한 걸음, 몸짓 하나에 두 걸음. 그들의 눈에 담긴 내 모습이 길을 내어준다. 


결국 나는 밧줄 위를 걷고 있는 셈이다. 언제 고꾸라질지 알 수 없다. 내 사소한 실수에 실망하여 나를 떠나갈 것 같아도, 나의 흔적이 부담스러워 언젠가 지워버릴 것만 같아도 내 손을 떠난 일이다. 비바람이 나를 덮칠 때처럼 간절히 바라는 수 밖에 없다. 나아갈 수 없을 정도로 거세게 날 흔들어도 나는 꿋꿋이 발걸음을 옮길 뿐이다. 그들이 나를 오랫동안 품어 주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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