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년생 김지유

오늘의 일기_1

by 김지유

2025년 캐나다 밴쿠버.

8월, 9월. 새롭게 시작하게 된 일에 나의 모든 감각이 날 서 있어야 했고, 스트레스에 잠 못 드는 9월을 지나고 나니, 10월 중순에 내게 남은 건, 극도의 스트레스로 생겨난 대여섯 가닥의 흰 머리카락과 ‘이제야 좀 여유 있는 몸과 마음’이었다.


일과 집만 오가는 일상에, 그 어느 누구도 만나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어떤 것들도 하지 않은 채로 지내는 일상은 생각보다 괜찮았고 좋았다. 아무런 이벤트가 일어나지 않는 고독의 일상을 보내는 건 기쁘거나 즐거울 일은 없지만, 대신 마음 아플 날이나 즐겁지 않을 날도 없다는 것이었다.


혼자 잘 서있는다는 건, 이런 느낌이구나.


'혼자 잘 서있는 사람'을 눈물로 갈망하던 서른셋의 밴쿠버 어른이는,

서른여덟에 세 번째 밴쿠버 살이를 하게 되어서야 울지 않는, '혼자서 잘 서있는 사람'이 되었다.


2008년 여름. 스물한 살의 나.

디자인과 학생인 나에게 영어과 교수님이 '영어를 제대로 배워보지 않겠냐는' 추천으로 처음으로 밴쿠버에 왔다.

도착하자마자 어학원 가는 길을 배우기 위해 첫 스카이 트레인을 타고 'Waterfront station' 역에 내렸을 때, 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두리번거리며 홈맘을 정신없이 쫓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서른여덟의 나는 또각구두에 잘 다려진 정장을 입고, 스타벅스 커피를 손에 든 채 'Waterfront station' 역에서 내린다. 스물한 살에 수강했던 그 수업을, 내가 가르치러.


한국에서 나고 자란 스물한 살의 디자인과 대학생이, 서른여덟의 영어강사가 되어 같은 Waterfront station에 내리기까지. 나의 젊은 시절의 모든 스토리가 영화 장면들처럼 지나갔다.


하루를 '해내야만 했던' 하루하루를 세 달 즈음 헤쳐오니, 이제야 '내가 앞으로 뭘 해야 하지'라는 물음표가 생긴다. 캐나다에서 학교는 커녕 유치원도 안 다녀본 내가, 당장 코앞에 닥친 ‘미국 아이비리그 학교’ 보내는 입시 수업에 적응해야했던 시간들. 하늘을 바라볼 숨이 쉬어지는 그제서야 나무색이 변했다는걸 인식했다. 이제 10월의 단풍을 즐길 여유가 생긴 것 같다.


그러니 이번 주말엔 따뜻한 팀홀튼 커피를 들고. 혼자 스텐리파크를 걸어야겠다. 내가 사랑하는 캐나다의 깨끗한 공기, 신선한 바람. 그것들이 지구 반대편에서 홀로 지내는 나를 버티게 해주는 '생명의 숨' 같은 것이니까.


'Waterfront station'에서 스물한 살의 나는 내 인생의 길이 어떤것인지도 모른채 그저 뛰었고,

서른여덟의 나는, 같은 그 플랫폼에서 천천히, 그러나 안전하게 잘 걷는다.

이제는 안다.

열정적으로 뛰지 않지만 안전하게 걷고 있는 지금도 내 삶의 소중한 장면이라는 걸.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의 모든 '사랑' 들도 잘 지내고 있었으면 좋겠다. 나처럼 단풍나무를 보고있겠지.


마음을 담아 Sum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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