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과 비교하지 말고 어제의 너와 오늘의 너를 비교해
# 아들아.
아들의 겨울방학 동안 나는 재택근무를 했다. 아들의 방은 현관문 바로 옆이다. 방에는 싱글 침대와 책상이 있고 작은 독서실 책상도 있다. 침대 옆에는 전기 기타와 통기타가 놓여 있고 바닥은 대체로 지저분하다. 아들은 자주 침대에 누워 있다. 내가 방문을 열어 보면 아들은 동그란 공벌레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다. 나방이 되기를 기다리는 누에고치를 닮은 것도 같다. 아들은 그 자세로 핸드폰을 본다.
가끔 아들은 책상에 앉아 있다. 유튜브를 보기 위해서다. 그럴 때 방문을 열면 아들과 나는 둘 다 머쓱해진다. 아들은 놀고 있는 모습을 들켜서 민망해하고 나는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구나' 하면서 실망을 한다. 아들이 가끔 독서실 책상에 앉아 있을 때도 있다. 그 시간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나는 '아주 가끔'으로 기억하는데 아들의 기억법은 다르다. 아들은 자주 앉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엄마 입에서 '아주 가끔'이라는 단어를 듣게 된다면 억울해할 것이다. 그래서 아들과 나의 대화는 늘 평행선이다. 서로의 기억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의 평행선은 좀처럼 만나지 못한다. 가끔 그 간격은 가까워졌다가 멀어진다
나는 아들을 키우면서 불안을 배웠다. 중학교 1학년 때 아들은 거의 매일 라면을 먹었다. 나는 라면 노이로제가 걸렸다. 아들이 심각한 병에 걸릴까 봐 걱정하느라 내가 먼저 병에 걸릴 지경이었다. 상담센터 선생님은 라면만 먹어도 건강할 수 있다고 위로했다. 나는 그녀의 태평스러운 표정에 분노를 느꼈다. (당신 자식이 매일 라면을 먹는대도 그 소리를 할 건가요?라고 따지고 싶었다)
중학교 때는 친구가 없는 아들 때문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 점심을 친구와 같이 먹었을까? 혼자 쓸쓸하게 먹었을까?' 걱정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학교에서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책상에 엎드려서 하루를 보냈을 아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아들이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불안은 한층 심층적이고 복잡해졌다. 고 3이 저렇게 공부를 안 해도 되는 걸까에서 시작한 불안은 가지치기를 해서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고 3이 저렇게 늦잠을 자도 되는 걸까? 배가 아프다고 조퇴를 해도 되는 걸까? 저렇게 인생을 대충 살아도 되는 걸까? 나의 얼굴은 어느새 근본 없는 철학자의 얼굴을 닮아갔다. 매일 골똘하게 고민을 하지만 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아침에 아들을 학교까지 태워다 주고 출근을 한다. 그때마다 나는 심각한 갈등을 겪는다. 아들한테 엄마로서 충고를 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큰 맘먹고 말을 뱉어 보려고 한다. 그 말은 이렇게 시작하는 말이다.
" 아들, 내 말 기분 나쁘게 듣지 마" 그러나 나는 말을 삼켜 버린다. 커다란 알약을 삼킨 것처럼 말이 목구멍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어느 인터넷 기사에서 읽은 적이 있다. 사람들은 ' 내 말 기분 나쁘게 듣지 마' 하는 말을 듣는 순간 기분이 나빠진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망설이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들은 학교 내신 시험 기간 동안 백수처럼 여유롭게 생활했다. 자신은 수시를 포기했으니까 내신 시험 준비는 하지 않을 거라고 선언했다. 그러면 정시 학원을 계속 가라고 했더니 심리적으로 불안해서 못 가겠다고 학원을 며칠 빼먹었다. 고 3 학원비는 터무니없이 비싸고 나는 자꾸 본전 생각이 났다.
아들이 다니는 인문학 학원 선생님이 상담 전화를 해 왔다. 아들은 중학교 때부터 인문학 학원을 다닌다. 아들이 방황하던 시절에 인문학을 배우면 그 방황을 끝내는 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서 보냈다. 인문학 선생님은 완고해 보이지만 선량하고 따뜻한 사람이다. 그는 주말이면 강원도 벽지로 교육 봉사를 다닌다. 아들의 근황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자 선생님은 작은 소리로 웃었다.
" 어머니, 만약 OO 이를 일반적인 고 3 학생과 비교하면 말도 안 될 거예요. 공부하는 양도 그렇고 집중력이나 의지력도 그렇고요. 하지만 3년 전에 처음 보았던 OO 이와 지금의 OO 이를 비교한다면 너무나 발전하고 있어요. 아주 조금씩 계속 앞으로 나가고 있어요. 그걸 칭찬해 주고 싶어요"
선생님의 말이 따뜻하게 내 안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왜 나는 아들을 남들과 비교하려고 할까? 아들을 일반적인 아이들과 비교하면 조바심이 나고 답답하다. 그러나 아들이 어릴 때부터 다른 아이들보다 늦되고 사회성이 부족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지금 아들은 아주 잘하고 있다. 과거의 아들과 현재의 아들을 비교한다면 아들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 사실을 나는 자주 잊어버린다.
이제 아들은 하교 후에 친구들과 같이 집으로 오고 주말이면 스터디 카페에 가자고 연락하는 친구들도 많다. 그 사실을 생각하면 감격스럽고 그 친구들이 모두 내 아들인 것처럼 안아 주고 싶다.
아들에게 냉정한 조언을 하며 부딪히던 시간이 있었다. 아들을 설득하고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해서 끊임없이 아들을 공격하고 비난하기도 했다. 친구도 없이 학교에서 투명인간처럼 지내는 아이를 나는 벼랑 끝까지 몰아붙였던 것은 아닐까. 그 시절의 나를 돌아보면 나는 반쯤 미쳐 있었고 아들은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그 시간을 통해서 가족은 가르치고 설득하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가족은 감정으로 이해하고 포용해야 하는 관계다. 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도 바로 자신을 믿고 사랑하는 가족의 존재이다.
아들은 앞으로 나가고 있다. 느리고 답답하고 엉뚱하지만 그래도 조금씩 발전하고 있다.
나는 자주 욕심을 내고 변덕스럽고 가끔은 속물적이다. 그러나 중심을 잡아야 한다. 생각 없이 급류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발끝에 힘을 잔뜩 줘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넘어지고 만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마음의 중심을 잡기 위해 발끝에 힘을 준다. 비 온 후 하늘이 말갛다. 내 마음도 말갛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