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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리게 걷기 May 19. 2021

남편은 지킬과 하이드

#남편의  다이어트

 남편이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최근 몇 달 사이에 몸무게가 80킬로 후반까지 올라가니까 덜컥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바지가 안 들어가고 셔츠가 터질 지경이 되자 남편은 심각한 목소리로 다이어트를 할 거라고 선언했다. 다이어트가 말처럼 쉽나.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다이어트의 이론으로 보나 역사로 보나 내가 한 수 위였다. 나는 원푸드 다이어트, 덴마크 다이어트, 간헐적 단식, 저탄고지 등 안 해 본 다이어트가 없다. 역사도 오래되어서 고등학교 이후로 지금까지 몇십 년간 지치지도 않고 계속 다이어트를 하고 있다. 물론 다이어트를 계속하고 있지만 몸무게는 일관되게 변동이 없는 상태다. 그마저도 몇 년 전부터 야금야금 올라가더니 지금은 인생 최대 몸무게를 찍고 있다. 


 처음 지방 발령을 받았을 때는 퇴근하고 헬스장을 다녔다. 그곳은 깡촌이라서 헬스장이 시내에 몇 개 없었다. 헬스장에 가면 김대리, 이 차장, 서 과장까지 회사에서 보던 얼굴들을 다 만날 수 있었다. 운동 끝나고 옆 건물 치킨 집에서 맥주 한 잔 하고 가자고 모인 게 화근이었다. 그 치킨집이 진짜 맛집이었기 때문이다. 운동을 끝내고 나서 마시는 맥주 한 잔과 치킨의 조화는 환상적이었다. 언젠가부터 운동을 하러 가는지 치킨을 먹으러 가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치맥 파티는 자주 열렸다. 당연히 살은 더 쪘고 얼굴은 언제나 부어 있었다. 

 다음에는 풍선 다이어트를 했다. 이 다이어트는 이름 그대로 대형 풍선을 불기만 하면 살이 빠진다는 다이어트였다. 시골에서 부모님이 오셔서 근처 한식 뷔페를 갔었다. 이것저것 집어 먹고 배가 터질듯한 상태로 집에 온 나는 극도의 후회를 하며 풍선을 불기 시작했다. 방구석에 앉아서 대형 풍선을 부는 나를 바라보던 부모님의 한심해하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 다음에는 커브스 다이어트를 시도했다. 커브스는 여성 전용 운동 클럽인데 10개가 넘는 운동기구를 30초 단위로 하는 운동이다. 사실 땀도 별로 나지 않고 식욕만 좋아져서 결과적으로 살이 더 쪘다. 커브스 원장이 자꾸만 화장품 강매를 하는 바람에 결국 그마저도 끊어 버렸다. 그 외에도 요가, 필라테스, 줄넘기, 달리기까지 안 해 본 운동이 없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살을 빼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식탐이다. 어릴 때 형제는 많고 먹을 건 부족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서 먹는 것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서 먹는 것을 포기하지 못한다. 재택근무를 할 때도 라면을 먹을지 비빔면을 먹을지 1시간 전부터 심각하게 고민한다. 그러니 살이 빠질 리가 없다. 


 그런데 남편은 나와 달랐다. 남편은 회사 점심시간에 PT를 하고 점심으로는 샐러드를 먹는다. 퇴근하고 나서도 헬스장에 가서 운동을 하고 온다. 저녁 식사는 단백질 셰이크나 우유를 먹는다. 이렇게 극단적인 다이어트를 시작했으니 살이 빠지지 않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다. 남편의 살들은 하루가 다르게 사라졌다. 작다고 입지 못했던 바지가 헐렁해졌고 셔츠도 오히려 커 보일 정도가 되었다. 사실 남편은 젊었을 때 잘생긴 얼굴이었다. 그 얼굴이 살과 지방에 묻혀서 잘생김도 묻혀 버렸는데 살이 빠지면서 턱선도 살아나고 예전의 얼굴 윤곽이 서서히 드러났다. 그리고 운동을 하면서 살을 빼서인지 젊어 보였다. 본인도 그런 드라마틱한 변화에 감동했는지 수시로 " 나 얼굴선이 변했지? 이미지가 달라졌지?" 이런 재수 없는(?) 질문을 자주 했다. 


 사실 남편이 저녁을 먹었는지 아니면 쫄쫄 굶고 들어오는지 나는 현관문 앞에서 바로 알 수 있다. 그러니까 그 날 저녁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에 따라서 남편은 지킬과 하이드처럼 완전히 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저녁을 먹은 날에는 술도 한 잔 걸쳤을 가능성이 높다. 술을 워낙 좋아하니까 반주 형태로 술을 걸쳤을 것이다. 순댓국을 먹었다면 소주를 곁들였을 것이고 족발을 먹었다면 막걸리를 한 잔 했다는 얘기다. 술과 밥을 거나하게 먹고 들어올 때 남편은 요란하고 유쾌하다. 현관문을 요란하게 열고 들어오는데 목소리도 힘이 있고 얼굴에는 기분 좋은 노곤함이 묻어 있다. 표정에는 웃음기가 가득하고 가끔은 장난스럽게 춤을 추거나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기도 한다.  


저녁을 쫄쫄 굶고 들어오는 날, 남편은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일단 집에 들어올 때 아주 조용하게 들어온다. 발걸음이 가볍고 말이 없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엷은 미소를 짓는데 표정이 차분하고 침착하다. 별 말이나 특별한 행동도 없다. 너무 시크해서 부담스럽고 말을 걸기도 조심스럽다. 남편은 옷을 갈아입은 후에 책상에 앉거나 방에 비스듬히 누워 있다. 기운도 없어 보인다. 내가 '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어? " 하고 물어보면 배가 고파서 기운이 없어 그런 거라고 대답한다. 이럴 때는 조심해야 한다. 약간 예민한 상태기 때문에 사소한 일에도 싸움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다. 이런 날 자동차 범칙금 통지서가 우편함에 있거나 하면 싸울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지난주에도 주차 위반 범칙금 통지서가 날아오는 바람에 아슬아슬한 순간을 넘겨야 했다. 그래서 나는 남편이 퇴근하고 들어오면 예리한 눈으로 남편을 관찰한다. 과연 오늘 남편의 상태가 지킬인지 하이드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남편이 살이 빠져서 잘 생겨진 것을 보면 기분은 좋은데 한편 예민하게 구는 것은 도통 보기가 꼴사납다. 



 딸아이가 이런 말을 알려 줬다.

"엄마, 사람이 살이 빠지면 겸손함도 같이 빠진대요"

그렇구나. 그래서 나는 이렇게 겸손한 것인가. 한편으로 너무 겸손해서 살이 좀 빠져야 될 것 같기도 한데 나는 앞으로도 쭉 겸손하게 살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러나 저러나 지킬과 하이드, 이 양반은 밥을 먹고 들어오려나. 오늘도 나는 촉각을 곤두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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