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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리게 걷기 Mar 30. 2021

우리 동네에는 특이한 의사 선생님이 있다.

 

 몇 년 전 지독한 목감기에 걸렸다. 처음에는 목이 아프고 부어오르다가 나중에는 거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힘겹게 소리를 내면 쉰 소리가 나왔다. 감기에 걸렸을 때 약을 먹으면 7일, 안 먹으면 일주일 만에 낫는다고 하지만 그래도 그냥 놔 둘 증상은 아닌 것 같았다. 

  집 근처에 마침 이비인후과가 있었다. 아파트 단지를 나와서 200미터도 되지 않는 상가 건물 2층이었다. 이비인후과 이름은 연세 이비인후과였다. 의사가 연세대를 나왔다는 거고 번듯한 상가 2층에 있는 병원이니 기본 이상은 할 거라는 생각으로 사전조사 없이 병원을 찾았다. 

 

 진료실에 들어가니 40대 중반의 의사가 앉아 있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고 진료 의자에 앉았다. 의사는 질문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특이점은 없었다. 언제부터 목소리가 안 나왔냐. 콧물은 나오지 않냐 하는 질문이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하다가 의사는 갑자기 나의 형제관계를 물었다. 

" 저는 여자 형제만 있는데요. 저희 집이 딸만 넷인 집이거든요. "

" 역시 그렇군요. 내 예상대로네요. "

"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 그러니까 환자의 증상은 특히 딸만 있는 집, 그중에서도 딸이 많은 집에서 나타나는 증상이에요"

나는 의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화가 점점 미궁으로 빠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 그러니까 환자분이 평소에 말을 많이 하니까 목이 그렇다고요. 특히 여자 형제만 있는 환자들이 이렇게 불필요한 말이 많아요. 아까 진료실에 들어올 때 인사를 했죠? 진료실에 들어올 때 인사를 하는 환자들은 일단 말이 많은 환자라고 보면 됩니다. "

의사의 설명에 압도당한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 아까 본인의 상태를 설명할 때도 불필요한 말을 했어요. 언제부터 아팠냐고 물었을 때 이틀 전이라고 하면 되는데 금요일부터 그랬고 주말에 심해져서 오늘은 말이 안 나온다고 했죠. 다 불필요한 설명이에요. "

" 네. 알겠습니다. " 내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냉큼 내 말을 잘랐다. 

" 이것 봐요. 지금도 불필요한 말을 하고 있어요. 그냥 고개만 끄덕이면 되는데 계속 불필요한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사를 쳐다봤다. 이제 입도 뻥긋할 수 없었다. 한 마디만 더 하면 의사한테 불호령이 떨어질 것 같았다. 나는 눈만 꿈벅거렸고 의사 선생님은 3일 치 약을 처방해 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진료실을 나오면서도 실수로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를 할까 봐 잔뜩 긴장한 채로 나왔다. 신기하게 약은 잘 들었다.  



 며칠 전 목 뒤에 두드러기가 올라왔다. 나는 해산물을 잘못 먹으면 금세 두드러기가 올라오는데 며칠 전 동죽찜을 먹었다. 목 뒤 머리카락이 닿는 부분이 간지럽더니 빨갛게 부풀어 올랐다. 안 되겠다 싶어서 집 근처 피부과를 검색했다. 마침 연세 이비인후과와 같은 건물, 같은 층에 피부과가 있다. 잠깐 진료를 받기로 하고 병원을 찾아갔다. 병원 문을 밀고 들어서는데 대기환자가 한 명도 없다. 카운터에는 여자 간호사가 앉아 있는데 마스크도 쓰지 않고 있다. 그 모습에 내가 우물쭈물하고 있으니 간호사는 황급히 마스크를 찾아 썼다. 어디가 안 좋아서 오셨어요? 간호사의 질문이 들려오는 찰나의 순간 갈등했다. 환자가 하나도 없고 절간처럼 적막한 이 병원에서 진료를 받을까. 아니면 500미터쯤 가야 하는 유명한 피부과로 발길을 돌릴 것인가. 


 그러나 나를 쳐다보고 있는 간호사를 뿌리치고 나갈 만큼 매정한 성격이 못 되는 나는 목 뒤가 간지러워서 왔다고 대답을 했다. 간호사는 바로 진료실로 들어가라고 했다. 진료실에 들어가니 의사 선생님이 계시는데 할아버지다. 그런데 할아버지 중에서도 호호 할아버지다. 얼핏 보기에도 80대 중반은 훌쩍 넘어 보이는 데다가 얼굴에는 검버섯이 퍼져 있다. 의사는 정년이 없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할아버지 의사가 질문을 던진다. 

어디가 안 좋아서 왔어요? 할아버지 의사는 가래 끓는 소리로 말한다. 겉으로만 봐서는 누가 의사고 누가 환자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의사는 노쇠해 보인다. 나는 목 뒤에 두드러기가 났다고 하며 보여 주었다. 해산물을 잘못 먹으면 이러는데 조개를 먹고 그런 것 같아요. 의사는 단호하게 손을 흔들었다. 이거는 해산물을 먹어서 그런 게 아니에요. 해산물을 먹어서 그렇다면 온 몸에 뒤덮여야 하는데 목에만 났잖아요. 이거는 물비누 알레르기예요. 

물비누 알레르기라는 게 있나. 처음 들어보는 용어에 어리둥절한 나는 다시 물었다. 그런데 물비누가 뭔가요? 할아버지 의사는 내 질문에 대답했다. 물비누는 물샴푸를 말하는 거예요. 물샴푸는 도대체 뭘까. 궁금한데 더 이상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아마 샴푸나 바디워시를 쓰지 말라는 말이겠거니 한다. 의사는 다시 한 마디 더 한다. 머리를 감지 말아요. 머리를 감지 말라니 당황한 나는 얼른 질문했다. 며칠이나 안 감아야 하나요?

의사는 당연한 걸 물어보냐는 듯이 핀잔을 준다. 그거야 두드러기가 다 나을 때까지 감지 말아야지. 의사의 대답에 나는 머쓱해졌다. 아이를 출산하고 며칠간 머리를 감지 않은 적이 있었지만 그때도 얼마나 근질근질하고 답답했는데 기약도 없이 머리를 감지 말라니. 


 밖으로 나오니 역시 대기실에는 환자가 한 명도 없다. 나는 처방전을 받아서 약국으로 갔다. 그래도 연륜이라는 게 있으니까 처방은 잘했을 거라고 위로하면서 말이다. 일단 처방받은 약을 먹었다. 바르는 연고도 듬뿍 발랐다. 그런데 약을 먹자마자 나는 병든 병아리처럼 골골대다가 그 자리에서 푹 쓰러져서 잠이 들었다. 그때가 저녁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얼굴이 퉁퉁 붓고 쌍꺼풀이 풀렸다. 흡사 벌에 쏘인 것 같은 얼굴이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것은 바로 온몸에 두드러기가 뒤덮어 버린 것이다.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빨간 두드러기가 올라와서 쳐다보기가 처참할 지경이었다. 회사 근처 피부과로 달려갔다. 의사도 나의 상태를 보고 놀란 눈치였다. 의사가 지어준 약과 연고를 가지고 돌아왔다. 다행히 약은 잘 들었다. 이틀 동안 약을 먹고 부지런히 연고를 발랐더니 피부는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할아버지 의사의 처방 때문에 톡톡히 고생을 했다. 할아버지가 이제 현역에서 물러나서 명예롭게 은퇴할 시점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저렇게 환자가 없는데 병원이 유지가 되는지 임대료는 낼 수 있는지 간호사 월급은 제 때 줄 수 있는지 쓸데없는 걱정도 해 본다.  


  남편은 그 건물이 이상하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그러고 보니 두 병원이 모두 같은 건물 2층에 자리 잡고 있다. 터가 안 좋은 것인가. 풍수지리학적으로 문제가 있나. 근거 없는 추측을 해 본다. 

 우리 동네에는 특이한 병원이 있다. 아니 특이한 의사 선생님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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