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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리게 걷기 Mar 29. 2021

현실부부의 데이트 동상이몽

# 현실부부

 남자가 데이트 신청을 했다. 금요일 오후에 반차를 내고 데이트를 하자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남자의 데이트 신청에 여자는 살짝 설렌다. 연애 10년, 결혼 17년, 거의 30년 묵은 이무기, 아니 커플 아니던가. 그들이 데이트라는 단어를 잊고 산지 벌써 몇 년째인지 손으로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이다. 주말에 같이 다니는 일이야 부지기수지만 평일에 휴가를 내고 둘이 만난 적은 생각해 보니 한 번도 없다.  


 새삼스럽게 무슨 데이트냐고 여자는 시큰둥하게 대답을 하지만 표정이 상기되어 있다. 모처럼 남자와 하는 데이트에 예전의 감정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모양이다. 


    그런데 남자의 데이트는 어딘가 이상하다. 일단 만나는 시간은 3시 30분, 만나는 장소는 앙리 마티스 전시회가 열리는 전시회장 바로 앞이라고 남자는 통보한다. 여자는 의아하다. 데이트라는 것은 모름지기 밥을 먹는 것에서 시작하는 게 아닌가. 데이트라고 하면 특별한 음식을 고급스러운 장소에서 먹는 거라고 기대했던 여자는 1차로 실망한다. 그러나 실망한 내색을 숨기고 남자에게 슬쩍 제안을 한다.  만나서 점심을 먹어야 하지 않겠냐고 말이다. 

 남자는 단호하다. 자기는 회사 건물에 있는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고 오겠다고 한다. 원래 점심을 우유나 단백질 셰이크로 때운다는 말도 한다. 여자는 감정이 상한다. 그리고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앙리 마티스 전시회 관람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낸다. 그러니까 남자는 앙리 마티스 티켓을 유효기간 안에 사용하기 위해서 데이트 신청을 한 것이다. 흠, 이것은 마치 유효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초콜릿을 선물로 주는 것과 같은 경우군. 여자는 감정이 상한다. 


 그러나 남자는 역시나 둔감하다. 그는 여자의 감정을 읽지 못한다. 데이트 하루 전날, 여자는 혹시나 다시 묻는다. 점심을 어떻게 할 거냐고 말이다. 남자는 점심은 각자 알아서 먹고 3시 30분까지 오라고 같은 말을 반복한다. 이건 데이트가 아니라 볼일 내지는 용무다. 여자는 울화통이 치밀지만 겉으로는 알겠다고 한다. 여자와 남자의 감정의 교류는 항상 그런 식이다. 여자는 남자한테 자기가 원하는 것을 먼저 말하지 않는다. 남자가 그걸 알아차리기를 바랄 뿐이다.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지만 남자에게는 그 주파수가 닿지 않는다. 


 데이트 당일날, 여자는 반차를 내고 회사에서 일찍 나온다. 회사 근처 쌀국숫집에 가서 양지 쌀국수를 시켜 먹는다. 식당에 사람들이 가득 차 있고 여럿이 웃으며 밥을 먹고 있기 때문에 여자는 심기가 더욱 불편하다. 여자는 쌀국수를 먹는다. 양이 많다. 여자의 표정은 꽤나 거칠다. 쌀국수를 거의 다 먹고 나니 바닥에 숙주가 깔려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걸 알지 못하고 면만 건져 먹은 것을 알게 되자 짜증이 치솟는다. 여자는 더욱 남자에게 화가 난다. 


 여자는 차를 끌고 앙리 마티스 전시회장으로 향한다. 남자가 입구에서 여자를 기다리고 있다. 남자의 스타일이 평소와 다르다. 네이비색 팬츠를 입고 흰색 셔츠에 회색 재킷까지 입었다. 한 손에는 만다리나덕 가방을 들고 있다. 아주 멋을 부린 차림새다. 몇 달 동안 점심을 안 먹고 운동을 한다더니 살이 쏙 빠진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여자는 남자의 잔뜩 멋을 부린 차림새에 심사가 더욱 뒤틀린다. 혼자서 꾸역꾸역 먹고 온 쌀국수가 소화가 되지 않아서 자꾸 트림이 올라온다. 그것이 더욱 여자를 짜증스럽게 만든다. 남자는 여자의 얼굴을 보고 눈치 없이 놀란다. 아니 표정이 왜 이렇게 안 좋아? 여자는 차가 막혀서 그렇다고 둘러댄다. 남자는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커피를 마시자고 여자를 이끈다. 전시장 바로 앞에 스타벅스가 보인다. 그런데 매장 안에는 자리가 하나도 없다. 여자는 심사가 더욱 뒤틀린다. 이 모든 것이 남자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여자는 남자에게 물이나 사 달라고 한다. 남자가 생수를 산다. 남자가 여자에게 묻는다. 오늘따라 이상하네. 왜 이렇게 표정이 안 좋아?


 여자는 남자도 심기가 불편해졌다는 것을 눈치챈다. 여기에서 조금 더 나가면 남자가 화를 낼 거라는 것도 본능적으로 느낀다. 싸움이든 전쟁이든 결국은 명분이다. 그것을 오랜 결혼생활 동안 여자는 터득했다. 명분 없는 싸움은 결국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눈을 찌르는 것과 같다. 지금 싸움을 시작해 봐야 여자는 명분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상황에서 왜 화를 내고 있는지 설명할 길이 없다. 점심을 먹자고 안 해서 화가 났다는 말도 이유가 되지 않는다. 카페 자리가 없어서 화가 났다고 하면 미친 여자 취급할 것이다. 여자는 슬그머니 꼬리를 내린다. 당신 오늘 스타일 좋네. 젊어 보인다. 여자는 가식적인 칭찬을 던진다. 이 남자가 어느 포인트에서 기분이 좋아지는지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여자는 남자의 기분을 풀어준다. 단순한 남자는 기분이 좋아져서 혼자 셀카를 찍어댄다.  


둘은 앙리 마티스 전시회를 즐긴다. 여자도 어느 정도 짜증이 누그러진다. 관람이 끝나고 나오니 시계는 5시 45분이다. 금요일 오후에 강남이라니 마음이 서서히 불안해진다. 운전은 여자가 하기로 한다. 남자는 회사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고 있느라 정신이 없다. 여자는 운전대를 잡고 주차장을 빠져나온다. 역시 여자의 운전실력은 화려하고 부드럽다. 여자는 막히기 시작하는 길을 아슬아슬하게 빠져나온다. 그녀의 뒤로 차들의 정체가 시작된다. 마치 그것은 불이 붙어서 폭발하기 직전의 사고 현장을 현란한 운전실력으로 빠져나오는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여자는 한숨 돌린다. 그녀 뒤로 차들이 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금요일 러시 아워에 걸린다는 것은 지옥이다. 여자는 남자가 운전대를 잡지 않고 자신이 잡은 것에 새삼 만족감을 느낀다. 남자는 세월아 네월아 운전하는 스타일이다. 남자가 운전했다면 아직도 전시회장 주변을 맴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집까지 가려면 20분쯤 더 가야 한다. 여자는 핸드폰으로 치킨을 주문한다. 집에 도착하면 딱 먹을 수 있도록 시간 계산까지 치밀하다. 이 정도면 완벽한 금요일은 아니더라도 거의 완벽한 금요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내비게이션은 두 개가 켜져 있다. 여자의 핸드폰 앱에 있는 내비게이션과 차량에 장착된 내비게이션이다. 전화 통화를 끝낸 남자가 갑자기 여자에게 차량 내비게이션을 가리킨다. 이 경로가 더 빨리 도착하니까 이 경로를 따라가라고 말한다. 여자는 그쪽으로 길이 없는 것 같은데 하고 대답을 한다. 그러나 남자는 좌회전 차선이 막히니까 차량 내비게이션을 따라서 우회전 후 유턴을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거듭 말한다. 


 여자는 좌회전하려던 계획을 바꿔서 오른쪽으로 빠진다. 그런데 빠지고 나서 보니 유턴구간도, 오른쪽으로 빠지는 길도 나오지 않는다. 그제야 내비게이션이 잘못된 것을 알아챈다. 내비게이션은 몇 년 동안 업데이트를 하지 않았다. 최근에 새롭게 뚫린 길과 터널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여자는 허둥댄다. 그런데 갑자기 터널이 나타난다. 아주 기다란 터널이다. 여자는 할 수 없이 터널로 들어간다. 차는 조금 전 겨우 빠져나온 서울 방향으로 다시 올라간다. 여자는 기가 막힌다. 터널을 빠져나와 보니 반대쪽 차선, 그러니까 여자가 다시 되돌아가야 할 길에는 차들이 아예 움직이지도 않고 있다. 


 여자는 허무함과 좌절감을 느낀다. 조금 전 현란한 운전실력으로 빠져나온 곳으로 다시 기어들어가고 있다. 이것은 코미디인가. 비극인가. 여자는 갑자기 옆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 분노를 느낀다. 남자도 여자의 호흡이 거칠어졌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자기에게 화가 난 줄은 모른다. 역시 남자는 상황 파악이 느리다. 

  그때 여자가 한 마디 뱉는다. 당신이 알려준 길로 빠지는 바람에 망했네. 물론 여자도 인정한다. 말투가 퉁명스러운 데다가 가시가 콕콕 박혀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거의 시비조의 말투였다는 것도 인정한다. 


 얌전히 앉아 있던 남자는 갑자기 고개를 돌린다. 지금 나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는 거야? 내비게이션이 업데이트가 안 되어서 경로를 잘못 알려 줬는데 그게 내 잘못이야? 남자의 언성이 높아진다. 


 이제 둘은 깨닫는다. 더 이상 이 곳은 데이트 현장이 아니라  총알이 난무하는 전쟁터라는 것을 말이다. 여자는 남자를 원망한다. 속으로 마구 비난의 화살을 던진다. 네가 길을 알려 줬지. 그럼 내가 알아서 빠졌냐. 여자의 내면의 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남자도 목소리를 높인다. 

 

 둘은 말없이 집으로 간다. 차 안에는 불편한 침묵이 흐른다. 여자는 몹시 불편하다. 운전을 하려면 백미러를 한 번씩 확인해야 하는데 지금 분위기로는 남자 쪽으로 고개를 돌리기도 싫다. 옆에서 콧김을 뿜어내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버스가 다니지 않는 길 어딘가에 버리고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휴가까지 내고 데이트를 하겠다고 나온 자신이 한심스럽다. 


 그 사이 치킨 배달원에게 전화가 온다. 치킨을 집 앞에 두고 가겠다고 한다. 치킨이 점점 식어갈 거라는 생각에 여자는 속이 탄다. 금요일의 바삭하고 뜨거운 치킨은 물 건너갔다. 


   말없이 40분쯤 달리니까 집 근처로 가는 익숙한 길이 보인다. 그나마 자신의 운전 실력 덕분이라 생각하며 여자는 차갑게 미소를 짓는다. 이제 집에 도착하면 어떻게 할까. 고민할 여지가 없다. 차를 일단 주차한 후에 바로 집을 나올 것이다. 도무지 남자와 둘이 집으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때 남자가 여자 쪽으로 몸을 돌린다. 남자가 말한다. 우리 이쯤에서 그냥 서로 풀지. 갑작스러운 화해 시도에 여자는 움찔한다. 사실 남자는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픈 데다가 금요일 저녁까지 싸우기에는 남아 있는 기운이 없었던 것이다. 여자는 잠시 생각한다. 바로 화해의 제스처를 받아 주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더 팽팽하게 맞서다가는 상황이 예기치 못한 수준까지 갈 거라는 것을 예감한다. 그리고 역시나 명분이 약하다. 명분 없는 싸움은 상처만 남긴다. 

 게다가 여자도 지금 배가 고프다. 여자는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인다. 둘은 서로 마주 보며 어색하게 웃는다. 격렬했던 전쟁은 싱겁게 끝이 나고 여자는 주차를 한다. 


  여자는 생각한다. 그래 아직도 치킨이 완전히 식지는 않았을 거야. 아직은 먹을만할 거야. 

  남자도 생각한다. 김치 냉장고 오른쪽에 테라하고 빨간 뚜껑 소주가 있을 거야. 어서 가서 시원하게 한 잔 해야겠어. 


 둘은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선다. 다행히 치킨은 아직 따뜻하다. 여자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치킨 박스를 들어 올린다. 남자도 신발을 벗고 서둘러 김치 냉장고로 달려간다. 다행히 김치 냉장고 안에는 빨간 뚜껑과 테라 맥주가 들어 있다. 둘은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식탁으로 다가간다. 


 그렇게 평범하지 않은 데이트가 끝나가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고 조마조마한 데이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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