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아버지께서 내 결혼식 전 어느 날 전화로 해주신 말씀이다. “남자는 원래 고마움을 모르는 존재다. 그러니 쓸데없이 괜히 너무 잘해주지 마라. 받아도 고마운 건 그 때 뿐이다. 그러니 니 주머니는 니가 따로 차고 관리해야 한다. 약은 고양이 밤눈 어두운 줄 모른다고......”끝말은 흐리셨다. 아마 “약은 고양이 밤눈 어두운 줄 모른다고 나는 니가 니꺼 못챙기고 나중에 눈물 흘릴까봐 걱정이다.”라고 염려의 말씀을 하고 싶으셨을 것이다.
아빠가 이렇게 말씀하시다니 참 아이러니하다. 발로 뛰며 사업을 일으키신 아빠가 사업 초반에 힘드셨을 때 교사셨던 엄마가 박봉에도 많이 보태주셨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아마 세월이 지나 딸의 결혼식을 맞이하며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을 아빠의 입장 바뀐 경험담이리라, 또 딸의 결혼을 앞두고 지난날에 대한 반성의 마음과 아빠의 아내이자 나의 엄마에 대한 미안한 감정, 덧붙여 딸에 대한 염려스런 마음이 피어오르셨으리라 짐작해본다.
결혼한 지 올해로 15년이 넘어가는데 ‘남자는 원래 고마움을 모른다. 받아도 고마워하는 건 그 때 뿐이다.’는 아빠의 말씀이 문득문득 떠오른다. 정말 맞는 말인 것 같다. 어떨 때는 이 말에 ‘그래, 원래 그렇지.’ 라며 위로도 받고 있다.
아이를 낳고 키우며 학업도 마치는 너무나 어려운 길을 걸었고, 25년간은 남이었던 시댁 식구들이 가득한 시댁에서도 살았었고, 애 셋을 키우며 다른 엄마의사들보다 일도 더 많이 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나를, 남편이 업고 다니지는 못할망정 섭섭한 소리들을 해대도 ‘원래 남자는 고마움을 모르는 존재야.‘ 조금이라도 기대한 내가 바보라고 생각하며 쿨하게 넘어가게 도와주는 것이 아빠의 그 말씀이다.
나의 엄마는 고등학교 지리 선생님이셨다. 내가 7살이 되던 해에 이제 곧 학부모가 되고 남편의 사업도 안정되었으니 일을 그만 두어라는 시댁 분위기에 휩쓸려 퇴직하셨다. 나는 퇴직 후 엄마가 방안에 힘없이 누워계셨던 뒷모습도 기억하고, 내가 중학교 때인가 엄마가 여러 군데 전화하시며 복직을 시도하셨던 모습도 기억한다. 이런 엄마가 나에게 해주신 말씀이 있다. “남자는 돈 벌면 다 돈 버는 유세를 하니, 너는 결혼해도 일 그만두지 말고 꼭 니 일을 계속 해라.”셨다. 아빠가 돈 버는 유세를 어떻게 하셨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내가 일을 하지 않고 남편이 벌어오는 돈만 바라보고 있었을 때 내 기분과 나의 자존감이 어떨지는 안겪어봐도 너무나 잘 안다.
내가 짧은 교직 생활 중에 만난 좋은 인연 중에 얼굴이 달덩이마냥 환하고 항상 밝은 모습으로 주위를 좋은 기운으로 채워주시는 동료 여선생님이 계셨다. 나는 그 때 결혼하기 한참 전이었고, 그 분은 아기 엄마였는데 그 분이 하셨던 말들 중 그 때는 이해가 전혀 안되었는데 지금은 너무나 이해가 잘 되는 말들이 있다.
“친정집에 용돈이라도 드리려면 남편 눈치를 봐야한다.” 와 “남편한테 설거지라도 해달라고 했는데, 남편 직장 동료들이 그 얘기를 전해 듣고 ‘니 와이프 미친 거 아니냐’고 했다”는 일화이다.
그 때는 선생님도 돈을 버시는데 왜 남편 눈치를 봐야할까 이해가 일도 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안정적이고 고소득에 속하는 직업을 가진 나도 친정에 용돈이라도 드리려고하면 남편이 아무 말 없이 있어도 남편 눈치가 조금은 보이니, 교사월급에 근 20년 전의 일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었겠다 이해가 된다. 또, 설거지 일화도 남편 동료들이 말을 심하게 한 건 맞지만, 근 20년 전의 일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그런 말이 그 사람들 입에서 나왔을 수도 있겠다는 정황 이해는 되는 것이다.
직업상, 또 내 성격상 배우러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한번은 셋째를 임신해서 배가 부른 채로 토요일 저녁마다 네 시간씩 일 년간 진행되는 세미나를 들었었다. 아직 어렸던 첫째, 둘째를 남편에게 맡겨두고 뒷통수로 날아오는 눈치의 화살에 뒷골이 당기면서도 환자들을 더 잘 치료해주고 싶은 욕심에 세미나를 들으러갔다. 거기서 같이 수업을 들었던 나보다 한참 선배인 여자선생님들이 해주신 말씀이 있다. “잘한다 잘한다 한다고 소처럼 일하면 안 돼.” 본인들의 경험에서 나오는 말씀이고, 부른 배를 안고 몇 시간씩 앉아서 수업을 듣는 나를 안쓰럽게 여겨 하신 말씀이시리라. 이 말씀도 종종 떠올려본다. ‘그래, 미련스럽게 나만 죽어라 열심히 하지는 말자’ 다짐하며 말이다.
셋째가 커서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그렇게 손이 많이 간다는 1학년도 무사히 지나가고, 아무것도 없이 시작한 우리 부부가 그래도 자그맣지만 안정적으로 병원을 운영해나가면서 나도 이제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항상 나만 희생하는 사람, 남보다 열심히 해야하는 사람으로 생각하면서 억울한 마음만 쌓이다가, 나도 다시 돌아보고 아이들도 다시 돌아보고 남편도 다시 돌아볼 여유가 이제야 조금 생겼다.
학업을 계속 하며 낳고 키웠기에, 사실 내가 낳기만 했지 한창 힘들 때는 친정에서 키워주신 첫째는 이제 중 2가 되었다. 공부를 곧잘 하는 것에 비하면 행동도 굼뜨고 욕심도 없고 말도 속 시원하게 조리있게 하는 편이 아니라서 내 잔소리의 주요 타겟이 된다. 실컷 언성 높여 잔소리를 해도 “그래도 나는 엄마 좋아” 라며 큰 덩치로 안기려들어 징그러우면서도 항상 뒤돌아서서 미안한 마음을 가지게 만드는 아이이다.
의사 국시 준비할 때 가져서, 외할머니가 ‘첫째 동생 생겼다’는 나의 전화를 뒤도 더 들어보지 않고 딱 끊어버리게 만들었던 둘째는 이제 초등 6학년이 되었다. 제일 열심히, 힘들게 일했던 첫 병원에서 임신 중기, 후기를 보내서인지 유독 작고 얼굴도 까맣고 못생겨서 다들 병원에서 애가 바뀐게 아니냐고 의심을 하게 만들었었다.
유일한 딸래미지만, 두 형제 사이에 끼여 있는 둘째라서 엄마의 관심이 가장 적게 가는 것을 알고 본능적으로 더 관심 받을 거리를 찾는 것인지, 엄마 쉬는 날마다 아프다며 조퇴도 하고, 발가락이 아프다. 머리가 아프다며 엄마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만들었었다. 이제는 학교 락밴드 보컬이 되어 온갖 공연들로 엄마의 관심과 손길을 제일 많이 받게 되었다.
태어나보니 금수저까지는 아니지만, 태어나보니 형, 누나도 있고, 의사인 엄마아빠도 있었던 우리 셋째 막내는 한글도 늦게 깨치고, 엉뚱한 소리도 곧잘 하지만 뭘 해도 예쁘고 귀여운 애교덩어리이다. (난 개인적으로 셋째 출산을 적극 권장한다. 집안의 엔돌핀이 된다.)
형이 했으면 백만배 혼났을 행동도 셋째가 하면 웃으며 넘어가게 된다. 이제는 초등 2학년이 되었고, 내 입에서 “엄마는 공부 못하는 건 상관없지만, 예의 없는 아이는 제일 싫어해.”하는 훈육의 소리가 나오게 만드는 아이이다. (공부에도 예의를 갖추라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나의 남편은 ‘감추어진 진주’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유급하고 군대 갔던 별볼일 없던 복학생이 나를 만나 용이 되었다. (아직 이무기인가?) 그런데 남편의 말을 빌리면, 밥도 못 먹던 아이를(공부하느라 바빠서 내가 밥을 못챙겨 먹었었나?) 자기가 구제했다고 하니, 누구 말이 맞는지는 나는 아는데 아마 남편은 계속 모를 것 같다.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어서 그 애환을 너무나 잘 이해하기에, 어떨 때는 마음이 짠해져서 남편이 힘들 것 같을 상황에서는 다정한 말 한마디라도 해주고 편도 들어주려 한다. 그런데 남편들은 그게 왜 잘 안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남자는 고마움을 모르는 존재다.’하며 마음을 비우게 된다.
이 책에서는 동네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워킹맘으로서 세 아이를 키우며 겪은 여러 에피소드들, 느낀 바, 여동생이 있다면 해주고 싶은 조언 등을 적으려 한다. 이 글을 읽는 엄마들이 동병상련을 느끼며 마음에 평화가 오길 바란다. 아이의 행복만이 아닌 엄마의 행복을 추구하려면 어떻게 해야할지 여러 가지로 생각해보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