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한 건 잡았다.
나는 퇴사를 하고 줄곧 아침마다 집 근처 큰 공원에 가서 산책을 한다. 사실 ‘산책’보다 ‘상상’을 하고 온다. 조금만 걷다가 벤치에 앉아서 쏟아져 내리는 햇살을 온몸으로 흡수한다. ‘저 여자 선크림은 발랐나?’(당연히 발랐다.)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주 온몸의 면적을 넓게 펴고, 고개를 뒤로 젖힌 채로 햇살을 받는다. 지난 4년간 이 시간에 회사 사무실 안에서 형광등 불빛에 익어갔던 나의 피부에게 햇살의 따사로움을 선물해 준다. 누가 봐도 지금 당장 회사에 다니고 있지 않은 젊은이의 포스를 풍기며 어딘지 모르는 곳을 응시한다. 평일 아침에는 내가 이 공원을 통째로 빌렸나 싶을 정도로 사람이 없다. 그래서 조용하고, 그래서 혹시나 먼발치에서 만에 하나 전 남자 친구가 우연히 이 공원에 놀러 왔다가 추레한 전여자 친구 모습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서 뒷걸음질 치며 카톡을 차단하고 굉장히 쿨하게 이별했던 커리어우먼 전여자 친구에 대한 연민까지 느껴버리지 않을까... 이런 걱정 없이 마음껏 늘어져 볼 수 있다. 또 회사 다닐 때는 앞머리가 너무 소중해서 출근 준비할 때 고데기로 말다가 실패하면 다시 재빠르게 앞머리만 감아서 말리고 다시 고데기를 하고 그러다가 헐레벌떡 지하철역으로 뛰어가며 ‘미쳤다 진짜. 아 맨날 앞머리 이래 아씨’ 이러면서 매일 한 뼘씩 성격이 안 좋아지는 걸 인지하곤 했는데 지금은 뭐 그냥 앞머리가 세 갈레든 네 갈레든 더듬이가 서 있든 말든 상관없다. 어차피 평일 오전 시간대에 공원에는 사람이 별로 없고, 젊은이들도 없을 시간이니까. 그렇게 나는 벤치에 앉아 있다가 이 상상 저 상상을 하다가 그게 살짝 지겨워질 때쯤에 장갑으로 엉덩이를 탈탈 털고 일어나 집으로 돌아온다.
오늘 아침에도 나는 공원으로 상상을 다녀왔다. 벤치에 앉아서 ‘오늘도 참 조용하다.’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때마침 저 멀리서 어떤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음악에 귀를 기울여보니 아주 오랜만에 듣는 ‘하모니카’ 소리였다. 음악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휙 돌려보니 내가 앉아 있는 벤치의 뒤편으로 한 2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벤치에 한 할아버지가 앉아서 하모니카를 입에 대고 연주를 하고 있는 게 보였다. 할아버지는 벤치에 앉아서 자신의 앉은 키에 맞춘 거치대를 세워두고, 그 거치대에 태블릿을 끼워놓은 채로 그걸 보면서 또 그 기기에서 흘러나오는 반주에 맞춰 하모니카를 불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아주 수준급의 연주가였다. 한두 번 이곳에서 연주를 한 게 아닌 것 같아 보였다. 나는 할아버지를 신경 쓰지 않는 척을 하기 위해 다시 고개를 원래 자리로 돌려 정면을 향해 뒀지만 온 신경은 할아버지의 연주곡에 꽂혀 있었다. ‘아 저 곡.. 최백호의..’ 어디에선가 많이 들어본 곡이었다. 그런데 나는 곧 곡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어느새 할아버지의 하모니카 연주에 심취해 상상에 빠져들었다.
‘아, 이걸 어디에서 들었더라..?... 분명히 몇 년 전에 누가 자기 얘기라면서 들려줬었는데, 아닌가? 아니면 내가 어떤 여행작가의 책에서 봤던 내용인가? 아무튼 어떤 여자가 아프리카인가로 여행을 갔었는데 그곳에 살고 있는 아이들을 만난 거야. 그런데 그 아이들 중에서 유일하게 한 아이가 '저 바다 너머의 세상'에 대해 궁금해하더래. 그래서 그 여자가 그 아이에게 자신이 가방 속에 있던 하모니카를 선물해 줬다는 거야. 그 아이에게는 그 하모니카 또한 저 바다 너머의 세상의 무엇이었을 테니까. 흠 그럼 나는 여기서 궁금한 게 생겨. 그 아이는 지금 어떻게 됐을까? 분명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면서 새로운 세상에 대해 궁금해하는 그 마음 그리고 그 깨어있는 생각을 갖는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잖아. 그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 그 바다를 건넜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그 마을에서 저 바다를 건너봤던 사람을 찾아갔거나 그 마을에서 제일 똑똑하다고 소문난 사람을 찾아갔겠지? 바다를 건널 방법을 찾아내고는 부모님을 설득했을 거야. 부모님은 반대했을까? 아니면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응원해 줬을까? 그리고 바다를 건너던 그날, 그 아이의 가방 속에는 그때 선물 받았던 하모니카가 들어있을 거야. ' 나에게 하모니카를 선물해 줬던 그분을 꼭 만나겠어.'라는 부푼 기대와 함께. 그 아이가 처음 닿았던 곳은 어디일까? 아시아로 왔을 것 같기도 해. 하모니카를 선물해 준 사람이 아시아인이었으니까. 아시아라면... 우리나라로 바로 왔을 수도 있고 아니면 일본? 중국? 흠 왠지 일본 삿포로에 닿았을 것 같아. 눈 많이 내리던 삿포로에 도착해서 그 아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눈이란 걸 보게 된 거지. 그것도 눈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내리는 지역이니까 아이가 마주한 건 그 폭발적으로 내리고 쌓이는 눈보다 큰 충격이었을 거야. 그렇게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아이의 시야는 넓어지지. 정처 없이 길을 돌아다니던 아이의 손에 들린 건 마을을 떠나기 전에 엄마가 아이의 손에 쥐어줬던 다이아몬드(?) 다섯 조각이었어. 아이는 그걸 들고 음식 냄새가 나는 곳으로 무작정 들어가고는 그 다이아몬드를 보여주면서 우두커니 서 있어. 적어도 배가 고프다는 표현을 해야 마땅하다는 걸 이 아이는 아직 모르는 거지. 그 아이가 들어간 곳은 어느 작은 카레집이었어. 그런데 ' 될놈될(될 놈은 된다)'인 건가? 카레집 사장은 그 아이를 보더니 카운터 옆 1인석 자리에 아이를 앉히고, 따뜻한 물 한잔과 곧이어 카레 한 접시를 내와. 아이는 그걸 허겁지겁 먹는데 '우와 이거 왜 이렇게 맛있어?'라며 또 한 번의 충격을 마주해. 그러고는 맨손으로 입에 묻은 카레를 쓱 닦지. 그리고 드디어 이런 생각을 해. '이제 뭐 해야 하지?'. 아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눈치라는 걸 보게 되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생존을 위한 눈치.’
정말 그 아이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산책 아니 상상을 하고 집에 돌아와서도 계속 그게 궁금하다.
2024년 1월 15일 월요일, 아침에 쓴 글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