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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빈 Mar 15. 2024

피렌체의 낮밤

이탈리아-피렌체(7.16)

#유럽여행 14일차 (2)


숙소에 짐을 풀고 한숨 돌린 다음, 피렌체 구시가지를 돌아보러 밖으로 나갔다. 늦은 오후시간이었음에도 완연한 낮의 풍경이었다. 그래도 정오의 강렬했던 햇살은 수그러들어 걷기 한결 편했다. 이전 여행지였던 베니스는 관광객도 많고 가게들도 화려하게 꾸며놓아서 일종의 테마파크 같은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그에 비해 피렌체는 좀 더 작고 조용한 마을 같았다.


도시마다 특색이 강한 이탈리아는 이동할 때마다 시경계가 아닌 국경을 넘어가는 느낌이다. 덕분에 한 국가 안에서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이런 점이 도시국가가 번성했던 나라의 강점이자 매력이 아닐까. 다양성에서 오는 시끌벅적함이 귀찮기보단 반갑고, 어수선하기보단 사랑스럽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아래, 작은 골목골목을 기웃기웃하며 걷다 보니 시뇨리아 광장과 베키오 궁전이 나왔다. 13세기부터 지금까지 피렌체의 중심으로 외교, 학문, 예술, 심지어 금융까지 장악했던, 중세역사에서 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메디치 가문의 본체. 지금은 피렌체 시청사로 이용되고 있고 일부는 박물관으로 공개되고 있었다. 단단하고 두꺼운 성체에서 위엄과 권위가 뚝뚝 흘러넘쳤는데, 의외로 건물 내부의 중정은 궁전 외관만 보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치문양의 곡선, 기둥마다 새겨진 세밀한 조각, 도시의 역사가 기록된 벽면의 그림, 어느 것 하나 섬세하지 않은 게 없었다. 무뚝뚝함과 투박함을 가장한 우아함, 외강내유의 매력이 돋보이는 건물이었다.


베키오 궁전을 보는데 세계사 수업에서 봤던 사진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사진 속 모습도 인상적이긴 했지만 직접 보니 2차원의 세계가 전해주지 못했던 질감, 두께, 색감이 두 눈에 또렷하게 각인되며 몇 배의 감동으로 다가왔다. 이래서 백문이 불여일견,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고 하나보다. 무언가를 평면으로 인식하는 것과 3차원의 공간으로 생생하게 감각하는 건 명백히 다른 일이었다. 이곳으로 오기까지 지나친 수많은 골목과 주위 풍경들이 합쳐지며 내가 서 있는 이 공간이 입체적으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다음에 오게 되면 지도를 보지 않고도 찾아올 수 있을 것 같았다. 피렌체와 조금은 친해진 기분이었다.


르네상스를 꽃피운 예술의 도시답게 바닥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 거리에서 버스킹하는 악사들이 자신의 재능을 펼치고 있었다. 이 모습이 도시를 한층 더 활기차게 만들고 있었는데, 내 눈엔 과거와 현재가 도킹하는 중으로 보였다. 미켈란젤로가 자신이 누비며 다녔던 거리 곳곳에서 생명력을 발하고 있는 지금의 후예들을 본다면 아마 함박웃음을 짓지 않을까.


가죽시장 근처를 지나가다 보니 어느 예능프로에서 봤던 행운의 멧돼지 동상이 있었다. 멧돼지 코를 만지면 피렌체에 다시 돌아올 수 있게 된다고 해서 슬쩍 만지고 지나갔다.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니 탁 트인 넓은 공간이 나왔다. 레푸블리카 광장으로, 피렌체의 응접실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만큼 굳이 찾아가려 하지 않아도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지나치게 되는 곳이다. 밀물과 썰물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밀려오고 떠나가는데 우리도 4일 동안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이 광장을 지나다녔다. 조금 뜬금없긴(?) 한데 레푸블리카 광장 오른편엔 이곳의 마스코트, 회전목마가 자리 잡고 있다. 웨딩스냅사진 명소로 유명하고 은근히 타는 사람도 많다. 누구의 아이디어로 언제부터 저 자리에 있게 된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보다 보면 원래 있어야 할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공복 상태로 걷다 보니 허기가 졌다. 산책은 이쯤에서 마치고 마트에서 장을 봐왔다. 저녁메뉴는 '삼겹살토마토파스타'. 오늘의 셰프인 오빠가 고기도 먹고 싶고 파스타도 먹고 싶다고 해서 일사천리로 정해졌다. 베이컨 대신 두툼한 삼겹살을 구워서 토마토소스에 버무렸는데 한국 돼지와는 달리 기름도 많이 나오고 육향도 좀 더 강해서 독특한 풍미가 느껴졌다. 기름진 삼겹살에서 오는 느끼함도 있었지만 그 기름짐에서 오는 감칠맛이 더 기가 막혔다. 결국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고서야 포크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후식으로 호스트가 챙겨준 과일까지 야무지게 먹고 나서 뒷정리를 하는데 배가 너무 불러서 그대로 누워 잘 수가 없었다. 때마침 숙소 창밖을 보니 길가엔 여전히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고 있었고, 우린 이대로 하루를 마감하긴 아쉬운 여행자였다. 그렇게 돼지와 토마토가 뛰노는 배를 부여잡고 밤산책을 나갔다.


말 고삐를 걸어놨던 고리.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모습이 독특하게 느껴진다.


완전히 어둠이 내린 거리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오렌지빛 가로등이 불을 밝혔고 차들은 거의 지나다니지 않았다. 찬찬히 숨을 들이켰다. 피렌체 거리의 밤공기는 차분하고 섬세했다. 한낮의 열기를 가득 머금은 지열은 천천히 식어가고 있었고 적당한 온도에 적당한 말소리를 담아낸 사람들의 웅웅거림이 골목을 채웠다. 바닥의 돌을 만져보니 기분 좋을 정도의 따끈함을 머금고 있었다. 


엄마는 낮에 캐리어를 끌고 갈 때는 그렇게 힘들었던 돌바닥이지만 밤에 걸으면서 보니 이 돌바닥은 없어서는 안 될 피렌체의 상징인 거 같다고 했다. 앞으로 피렌체를 떠올리면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제일 먼저 머릿속에서 들려올 것 같다며. 그리고 '피렌체'라는 이름이 너무 예쁘다면서, ㅍ에서 시작해 ㄹ은 부드럽게 흘러가다가 ㅊ에서 터지는 소리가 마치 예쁜 꽃이 피어나는 것 같다고 했다. 하긴 애초에 Firenze가 Florence(꽃이 피다)에서 유래되었으니 꽃이 피어나는 이미지가 연상되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건지도 모르겠다.


여행을 시작하고 딱 2주일이 지났다. 여행의 절반이 지난 시점이자, 여행의 절반이 남은 시점. 조금은 지치기도, 조금은 한국이 그리워지기도 하는 때다. 그래도 절반을 넘어오면서 아무런 사고 없이 무탈하게 여행을 하고 있어서 다행이다, 내일은 또 뭐 먹지, 이런 얘기를 두서없이 두런두런 하면서... 그렇게 피렌체에서의 첫날밤이 저물어갔다.


피렌체를 가로지르는 아르노강 위의 베키오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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