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피렌체(7.17)
#유럽여행 15일차 (1)
아침 일찍 일어나 피렌체 대성당으로 향했다. 이전 여행지에서는 어딘가를 가기 위해선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했는데 피렌체는 걸어서 주요 명소들을 다 갈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도착한 지 24시간도 되지 않았지만 벌써 도시가 안락하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선선하고 상쾌한 아침 공기를 듬뿍 들이쉬며 거리를 걸어갔다. 어제 잠깐 산책했다고 그새 눈에 익은 골목들이 반가웠다. 이른 시간인데도 노천카페에 앉아 여유롭게 커피 한 잔씩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고 어젯밤과는 또 다른 활기가 사람들의 얼굴에서 느껴졌다.
목적지에 가까워지자 제일 먼저 주황색 돔이 건물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조금 더 걸어가자 골목 끝에 쏟아지는 아침햇살을 받으며 황금빛으로 물든 대성당이 보였다. 새파란 하늘 아래 사람을 홀리는 듯한 영롱한 모습에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십자가를 닮은 피렌체 대성당이 숨 막히는 자태를 뽐냈다. 정식 명칭은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으로 꽃의 성모마리아 대성당이란 뜻을 지닌 이 위대한 건축물은 세계에서 4번째로 큰 성당이자, 중세시대부터 지금까지 피렌체의 심장을 담당하고 있다. 성당을 짓는 작업은 1296년에 시작되었지만, 완공된 건 1436년에 브루넬레스키의 돔을 꼭대기에 얹으며 비로소 완성됐다. 장장 140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완성된 대작이다.
개장 30분 전에 왔는데 입장을 위해 줄 선 사람들이 이미 성당 벽을 따라 반바퀴를 서 있었다. 들어가는데 1시간 30분 정도 걸렸는데 다행히 그늘이라 시원했고 벽에서 나오는 냉기가 천연 에어컨을 방불케 해 전혀 덥지 않았다. 땡볕에 서있어야 했으면 피렌체 대성당에 대한 기억이 별로 좋지 않았을 텐데 덕분에 지금까지도 즐거운 느낌으로 남아있다. 우리 앞에선 프랑스어가, 뒤에선 아랍어가 들려왔는데 이 또한 재밌는 경험이었다.
피렌체 대성당은 외관에 대한 첫인상이 매우 독특했는데, '이게 뭐지?' 싶을 정도로 이제까지 살면서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던 문양과 색감이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오묘한 초록빛의 초콜릿 틴케이스 같다고 해야 할까. 거기에 장밋빛과 상아빛의 대리석까지 더해져 궁극의 화려함을 자아냈다. 밤에 봤을 때는 어느 외계 행성의 궁전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낮에 보니 지구라는 행성 위에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주선을 타고 가지 않아도 돼서. 비행기를 타면 보러 올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하하.
밖의 햇살이 따사로워서 성당 내부도 엄청 밝고 화사할 줄 알았는데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많지 않아서 그런지 내부는 생각보다 어두웠다. 또 화려함과 섬세함을 지닌 외관과는 대조적으로 내부는 소박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절제미가 돋보였다. 뭐든 과하면 오히려 매력이 반감될 수 있는데 힘을 줘야 하는 부분과 누그러뜨려야 하는 부분을 적절하게 구사해 낸 균형미가 좋았다.
돔 부분의 천장을 가득 메운 바사리의 최후의 심판 프레스코화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아니, 아름답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가 없어서 넋을 놓고 봤다.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인간의 언어에 한계가 얼마나 공고한지, 그 한계선 너머의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성당 내부 관람을 마치고 높이 106m, 지름 45.5m에 이르는 거대한 돔, 큐폴라(Cupola) 정상으로 향했다. 464개의 계단이 유독 좁고 가팔랐는데 이번 유럽여행에서 갔었던 전망대 중에 제일 좁게 느껴졌다. 그래도 올라가는 중간중간 밖을 볼 수 있는 창이 있었다. 폐쇄적이고 좁은 통로 중간에 한 번씩 나타나는 바깥 풍경은 숨통을 트이게 해주는 쉼터 같은 역할을 했다.
피렌체 대성당은 건축학적으로도 흥미로운 지점이 많은데, 제일 유명한 건 돔과 관련된 이야기다. 피렌체는 중세 시대에 시에나와 경쟁하던 중 일단 대성당을 크게 지었지만 정작 당시의 기술력으론 대성당의 천장 지름을 덮을 돔을 만들 수가 없었기에, 당시의 대성당은 돔 없이 미완성인 상태로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브루넬레스키가 기발한 방법으로 돔 설계를 제안했고 그 결과, 미켈란젤로도 아름답다고 극찬한 현재의 돔이 완성되었다.
브루넬레스키의 묘수는 당대의 기술력으로 건축 가능한 좁은 지름의 돔을 먼저 만들고, 그 위에 공간을 띄운 다음 외벽에 해당하는 돔을 2중으로 만들어서, 외부에서는 거대한 대성당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돔을 완성한 것이다. 이 때문에 현재의 우리는 내측 돔과 외측 돔 사이의 공간을 통해서 돔 꼭대기로 올라갈 수 있다. 단점이라면 위로 올라갈수록 돔의 곡률로 인해 사선으로 삐딱하게 걸어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전까지는 나선형으로 돔을 돌아가다가, 출구를 향해 돔 꼭짓점으로 올라갈 때는 거의 직각으로 올라간다. 처음 각도를 봤을 땐 헉! 했는데 다행히 조금만 올라가면 바로 정상이었다. 올라가다 보면 통로 옆으로 내측 돔과 외측 돔 사이 비어진 공간이 보이는데 유심히 보자. 브루넬레스키의 지혜가 보인다.
큐폴라에 올라서자 주황색 지붕으로 뒤덮인 중세풍의 시가지가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졌다.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강렬한 햇살 아래 엄청나게 부는 바람을 맞으며 서 있으니 자유로운 한 마리의 새가 된 기분이었다. 한 번씩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때가 있는데, 이때가 바로 그랬다. 난간에 손을 얹고 시간이 멈춘 듯한 이 도시를 눈동자 깊이 담았다.
열심히 큐폴라를 올랐으니 텅 빈 배를 채우러 점심을 먹으러 갔다. 피렌체는 중세시대부터 목축업과 축산업이 발달해서 원래 가죽 공예로 유명한 곳이다. 가죽시장이 따로 있을 정도인데 그 때문인지 티본스테이크가 유명하다. 우리는 그중에서 한국인들에게 가장 유명한 레스토랑인 달오스떼로 향했다. 배고픈 와중에 모험정신까지 발휘할 힘이 없었다. 지금 우리에겐 검증된 곳이 필요했다.
핫플이긴 한지 2시가 다 되어가는 애매한 시간대에 갔는데도 약간의 웨이팅 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가 주문한 건 스테이크와 버섯크림리조또. 3가지 소스가 나와서 입맛에 맞게 찍어 먹으면 됐다. 대부분의 유럽 레스토랑은 주문하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하고 눈 마주치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여기는 한국인들이 많이 와서 그런지 서버분들이 세심하게 손님들을 살피고 뭔가 필요해 보인다 싶으면 먼저 와서 말을 걸었다. 낯선 외국에서 한국의 향기가 물씬 느껴지는 곳이었다.
스테이크를 미디엄레어로 시켰는데 고기를 칼로 잘랐더니 피가 흘러나왔다. 소고기는 핏기만 가실 정도로 살짝만 익혀서도 먹으니까 웬만하면 그냥 먹으려고 했는데 접시의 반을 적실 정도로 흥건하게 흘러나왔다. 고기 잘 먹는 우리가 보기에도 이건 좀 심하다 싶어서 더 구워달라고 요청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이탈리아에서는 미디엄레어로 구워달라고 하면 레어에 가깝게 굽는다고 한다.
솔직히 맛은 그냥 그랬다. 개인적으로 숯불에 구워 먹는 한우가 훨씬 맛있는 것 같다! 하하. 여행을 하면서 고기를 많이 먹어서 그런지 양이 많아서 그런지 반 정도 먹으니 물렸다. 하지만 남기지 않고 싹싹 끝까지 먹었다. 여행자에겐 두 가지 철칙이 있으니까. 화장실은 보일 때 무조건 갈 것, 그리고 먹을 수 있을 때 무조건 많이 먹어둘 것!
부른 배를 톡톡 두드리고 힘차게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