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피렌체(7.17)
#유럽여행 15일차 (2)
스테이크로 배를 두둑이 채우고 우피치 미술관으로 향했다. 'ㄷ'자 형태의 건물은 중세시대 거리의 돌바닥을 밟고 다녔을 말들의 말발굽을 연상하게 했다. 티켓을 온라인으로 미리 예매해 왔는데 바우처가 있다고 바로 입장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박물관 입구 쪽에 있는 3번 창구에서 줄을 서서 바우처를 실물티켓으로 교환하고 입장 줄을 다시 서야 짐검사 후, 비로소 미술관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왜 두 번 일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피렌체에 왔으니 피렌체 법을 따라야지. 모를 땐 무조건 물어보는 게 상책이다.
오전에 피렌체 대성당을 1시간 30분 걸려서 들어간 전적이 있는지라, 이번에도 줄을 길게 서야 하는 줄 알았다. 다행히 우피치 미술관은 입장하는 데 금방금방 들어가서 15분 정도 기다렸다가 들어갈 수 있었다.
우피치 미술관은 원래 미술관으로 설계된 건물이 아니었다. 16세기 메디치가의 코시모 1세가 베키오 궁전만으론 행정업무를 보는데 부족해지자 지은 두 번째 궁전으로, 우피치 궁으로 불리던 메디치 가문의 집무실이었다. 이탈리어로 ‘우피치’는 관공서나 사무실을 뜻한다. 르네상스 회화의 컬렉션으로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세계 제일의 미술관으로 평가되고, 베키오 궁전과는 다리로 연결되어 있어서 밖으로 나오지 않고도 다닐 수 있게 되어있다. 메디치 가문의 몰락 이후, 이들의 미술품 컬렉션은 마지막 메디치가의 후손인 안나 마리아 루이자 데 메디치가 피렌체시에 기부하면서 일반에 공개되기 시작했다.
미술관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을 읽으면서 계단을 올라가다 보니 첫 전시실에 도착했다. 그런데 미술관 내부는 생각보다 그리 시원하지 않았다. 직사광선만 없다 뿐이지 밖의 온도, 습도와 비슷했다. 밖이 워낙 더웠어서 내부에 들어왔을 때 쾌적하고 시원한 냉기를 기대했건만 내 바람은 보기 좋게 물 건너갔다. 건물 내부는 오히려 관람객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로 후끈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유럽의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작품을 감상할 때마다 느끼는 건데, 작품 자체도 대단한 예술성을 지녔지만 그에 못지않게 건물도 너무나 아름답다는 것이다. 기둥, 천장, 바닥, 유리창 어느 곳 하나 허투루 지나친 게 없었다. 원래 궁으로 쓰였던 건물이라 더 그럴 수도 있지만 환경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선물 자체에도 눈이 가지만 선물을 담고 있는 상자가 예쁘면 그 안에 담긴 물건이 더 예뻐 보이는 것처럼. 미술관에 작품이 전시된 것인지, 미술관이 작품을 전시하는 것인지 그 주종관계에 의문이 들 정도로 공간이 주는 힘이 컸다. 우피치에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명품 스카프를 펼쳐놓은 것처럼 우아한 천장화의 하늘이 우리를 따라왔다.
이 작품을 보기 위해 우피치에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다른 전시실에 비해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긴 했지만 루브르박물관의 <모나리자>에 비하면 10분의 1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유로운 마음으로 기다렸다. 가까이에서 보니 옷의 주름 하나하나 물결 하나하나 감촉이 느껴지는 것처럼 생생했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첫인상이 강렬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부드럽고 잔잔하고 은은했다. 그보다 내 시선을 사로잡은 건 따로 있었다.
작품 옆에 <비너스의 탄생>과 똑같이 생긴 작은 입체그림이 하나 있었는데 이걸 보는 순간 '아, 이거구나!' 싶었다. 초등학생 때 읽었던 한 미술 권장도서에서 봤던 거였다. 유명한 작품에 대한 설명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데 유독 이 <비너스의 탄생>을 축소한 3D 프린팅 복제품만은 기억에 남았다. 시각장애인들이 작품을 손으로 만지면서 감상할 수 있도록 3D 프린팅 기술을 이용해 평면의 회화를 입체감 있게 표현한 복제품인데, 불과 2~3㎜의 차이지만, 시각장애인들이 느끼는 데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했다.
몰랐으면 여기 이런 게 있는지도 모르고 넘어갔을 텐데 신기했다. 책에서 봤던 걸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감격스럽기도 하고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어릴 땐 여기에 이렇게 오게 될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엄마와 오빠에게도 알려주니 "오, 그런 거야?" 라며 반응이 좋아서 뿌듯했다.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인다. 아는 게 많아져 세상이 넓어지길 바란다. 눈을 감고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집중해 보았다.
우피치 전체가 교과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미술교과서에서 봤던 작품들이 셀 수 없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중에서 단번에 내 시선을 사로잡았던 작품은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였다. 봄을 뜻하는 제목에 걸맞게 보고 있으면 마음속에 봄이 찾아온 것처럼 따스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앞서 봤던 <비너스의 탄생>보다 <프리마베라>에 더 마음이 갔다.
참고로, 우피치에 있는 라오콘 군상은 복제품이고 바티칸 박물관에 진품이 있다고 한다. 다음 여행지가 로마라 진품과 복제품에서 느껴지는 아우라가 어떻게 다를지 궁금해서 역설적으로 더 눈이 갔다.
그렇게 한참 작품을 보고 있는데 뭔가 이상했다. 내가 작품을 보는 방식과 다른 사람들이 작품을 보는 방식이 다르다는 걸 깨닫는 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른 외국인 관광객들을 유심히 보니까 대부분 작품을 먼저 감상한 다음, 자신이 좋았던 부분을 중점으로 사진에 담았다. 반면에, 나는 사진부터 찍고 작품을 봤다. 생각해 보니 전자가 합리적이면서 좋은 방법인 것 같았다. 이중으로 찍지 않아도 되고 좋았던 작품을 더 깊고 오래 기억할 수 있으니까. 오랫동안 보고 마음에 닿았던 부분을 찍은 작품은 나중에 사진을 보더라도, 이 작품에서 찾아낸 나만의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무엇보다 작품을 사진 속에 먼저 담고 나면 '소장'했다는 생각에 작품을 감상하는 데 소홀해지는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물론 작품을 감상할 충분한 시간이 없다면 아쉬운 마음에 사진이라도 찍어야겠지만. 먼저 찍고 보는 건 영점조준이 잘못된 것이었다. 이후부턴 작품을 충분히 음미한 다음 사진을 찍었다.
잠시 쉬어가는 공간이면서, 두 채의 건물을 잇는 회랑에서 바라본 풍경은 아주 상징적이었다. 피렌체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피렌체 대성당 돔과 베키오 궁전, 베키오 다리, 그리고 아르노 강. 이 모든 게 우피치 미술관의 회랑에서 보였다. 그저 미술관인 줄만 알았는데 피렌체의 주요한 곳들을 집약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지리적 요충지였다. 메디치 가문이 왜 이곳에 궁을 신축했는지 알 것 같았다.
베키오 궁전에서부터 시작해 우피치를 거쳐 강 건너 피티궁전까지 약 1km 정도 이어지는 메디치가의 비밀통로, '바사리의 회랑'의 연결지점이라는 점에서도 우피치는 메디치 가문에게 중요한 곳이다. 집이었던 피티궁전에서부터 직장인 베키오 궁전까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다른 사람과 접촉하지 않고 걸어올 수 있도록 만든 길인데, 벽에는 수준 높은 회화작품들이 전시되어있다고 한다. 매일 이 길을 걸으며 메디치가의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 회랑과 얽힌 재밌는 상상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바사리의 회랑은 2016년부터 보수 공사를 시작해서 우리가 갔을 땐 폐쇄되어 있었다. 원래 2021년에 재개장한다고 했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연기돼서 기약 없는 기다림이 계속되고 있다. 오히려 좋다! 언젠가 다시 와야 할 이유가 생겼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