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운전자를 위한 팁#1
7년 동안 서랍 속에 고이 모셔져 있던 운전면허증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건 순전히 '도서관' 때문이었다. 시립도서관이 새로 생겼는데 대중교통을 타고 가려면 환승 1회를 포함해 1시간 20분이 걸렸다. 무려 1시간 20분.. 그것도 편도로! 자차로 가면 20분 걸리는 거리를 둘러둘러 가다 보니 4배가 넘는 시간이 소요됐다.
처음에 두 번 정도는 버스를 타고 갔다 왔는데 시간도 시간일뿐더러 체력소모가 많이 됐다. 양손 가득 책을 들고 한 번 갔다 오면 진이 다 빠지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아빠랑 오빠한테 태워달라 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계속 부탁하기 미안했다. 그래도 동네도서관에선 구할 수 없는 책이 많은 시립도서관을 포기할 순 없는데... 아, 이래서 차가 있으면 유지비가 드는 만큼 삶의 질이 달라진다고 하는 거구나.. 그전까진 도로에 굴러다니는 차들이 무심히 보였었는데 갑자기 엄청난 자유를 영위하는 마법양탄자처럼 보였다.
그렇게 고민하던 차에 어느 날 집에 아무도 타지 않는 중고차가 하나 생겼다. 260,000km를 주행한 2010년식 중형 세단. 오래되긴 했지만 그래도 차는 차였다. 운전면허증도 있겠다, 차도 생겼겠다, 명분까지 완-벽. 3박자가 맞아떨어지는데 안 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얼떨결에 운명처럼(?) 운전을 시작하게 됐다.
9개월 차 차린이로 살아보고 알게 된 건, 도로 위 세계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상대차와 대화하고 시그널을 읽고 타이밍을 맞춰야 하는 종합예술열전이 펼쳐지는 곳이었다. 아빠가 늘 하는 말인, "운전은 나만 잘한다고 사고가 나지 않는 게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방어운전’을 해야 한다."라는 게 어떤 건지 매일매일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그렇게 혼자만의 경험치를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던 중에 20대 후반에 접어드니, 주위에서 이제 운전을 시작하는 친구들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미 운전경력이 몇 십 년씩 된 부모님들은 운전을 감각적으로 하시는 경우가 많았고, 어떤 부분을 초보운전자가 어려워하고 힘들어하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무법지대인 도로 위에서 어떻게 하면 방어운전을 할 수 있는지, 처음 운전을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실전 상황에서 몸으로 부딪히면서 배우고 깨달은 바들을 "차린이의 입장"에서 기록해보려 한다.
장롱면허 탈출 첫째 날. 퇴근한 아빠와 첫 도로연수에 나섰다. 비장하게 운전석 문을 열었다. 늘 차 뒷문만 열다가 운전석 문을 여니 뭔가 다른 차원의 세계에 발을 들인 것 같았다. 느낌만 그런 게 아니라 머릿속도 몸의 감각도 새로웠다. 마치 새로 태어난 것처럼 뽀얀 백지상태랄까. 7년 만에 운전석에 앉아서 아빠에게 내가 처음 한 질문은,
"아빠, 내가 몰라서 그런 건 절대 아닌데, 오른쪽이 엑셀이고 왼쪽이 브레이크.. 맞지?^^"
순간 조수석에 앉은 아빠의 얼굴에 그늘이 지는 것 같았지만 음, 그냥 나의 기분 탓으로 넘겼다. 이 정도면 면허를 다시 따야 하는 게 아닌가 싶긴 했지만, 차근차근 연수를 받아보기로 했다.
나의 첫 차, 우리 스카(내 차의 애칭이다)는 열세 살이다. 그 말인즉슨, 모든 게 아날로그라는 뜻이다. 버튼만 누르면 시동이 걸리는 요즘 차와 달리 열쇠를 꽂아서 돌려야 하고, 사이드브레이크는 손으로 당겨서 올리고 내려서 풀어야 한다. 사이드미러는 수동으로 버튼을 눌러서 접고 펴야 하고 차문을 잠글 때는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경적 소리가 "빵!" 하고 울려 퍼진다. 자동으로 되는 기능이 거의 없으니 조금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처음엔 시동 켜는 감도 없어서 키를 꽂고 돌리는 것도 긴장이 됐다. 혹시나 너무 세게 돌려서 키가 부러지면 어떡하지, 너무 깊게 꽂아서 키가 안 빠지면 어떡하지, 와 같은 하찮은 걱정들이 별책부록처럼 따라왔다. 우려와 달리 시동은 시원하게 걸렸다. 다음으로 전조등, 방향지시등, 와이퍼 작동, 에어컨/히터 조작, 공기순환버튼 등 기본적인 조작법을 익혔다. 달칵달칵, 몇 번 반복해서 해보니 어렵지 않게 손에 익힐 수 있었다. 내가 제법 잘 따라오자 이번엔 아빠가 출발하라는 주문을 넣었다.
"출발? 지금?? 이렇게 바로??? 나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운전석에 앉은 지 3분도 안 돼서 출발이라니? 엑셀이랑 브레이크랑도 이제 막 상견례했는데, 이런 내가 출발이라니?? 내가 당황해서 이렇게 말하자 아빠는, "마음의 준비가 어딨어, 차가 준비됐으면 가는 거지."라는 명언을 날리며 쿨하게 받아쳤다.
그렇게 벌렁거리는 심장과 달달 떨리는 다리와 함께 어찌저찌 출발했다. 목적지는 집에서 15km 정도 떨어진 구립도서관. 처음엔 미어캣모드로 도로 위에 기어가는 개미새끼 한 마리까지 보겠다는 일념으로 잔뜩 긴장했다. 하지만 멀리 보라는 아빠의 말과 함께 운전을 할수록 예전 감각이 살아나면서 조금씩 적응이 됐다. 아빠는 길에 놓인 모든 게 학습자료인지 표지판부터 시작해서 신호등, 보행자, 교통상황 등에 대해 스포츠경기 해설자처럼 쉴 새 없이 얘기했다.
출발하고 10분 정도 됐을 땐 한창 자신감이 붙었다. 좌회전, 우회전, 교량통과, 차선 지키기 모두 자연스럽게 해내곤 '오, 역시 감이 죽지 않았어. 살아있네~'라며 어깨를 들썩였다. 이번엔 동네를 벗어나 큰 도로로 나갔다. 도시를 관통해서 지나가는 메인도로라 평소에도 화물차와 대형 트레일러, 버스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이었다. 조금 달리자 저 앞에 지하차도가 나타났다. 편도 2차선 지하차도였고 나는 2차선으로 진입했다.
수도 없이 지나다닌 지하차도였지만 내가 운전해서 들어가는 건 처음이라 다시 긴장이 확 됐다. 차선을 느끼면서 천천히 진입했고 순간적으로 빛이 줄어드는 구간에선 눈을 부릅떴다. 잠시 강의를 쉬고 있던 아빠가 좋은 학습자료라 생각했는지 지하차도 진입 시 주의할 점을 다시 속사포로 설명했다. 난 아빠 말에 집중하기 위해 속도를 살짝 줄였다.
그때였다. 뒤에 따라오던 대형 트레일러가 "빠앙!" 하고 경적을 울렸다. 지하차도 안에서 큰 차가 경적을 울리니까 진동이 느껴질 정도로 어마무시하게 울려 퍼졌다. 처음 든 생각은 '뭐지? 나한테 한 건가??' 그다음 이어진 생각은 '뭐야? 왜 나한테 한 거야?! 잘 가고 있는데!' 그런데 아빠가 뒤를 보더니 비상등을 켜면서 "어이고, 트레일러가 뒤에 있었네. 속도 좀 올리자."라고 했다. 영문은 모르지만 일단 속도를 올렸다.
아빠가 말하길, 화물차나 트레일러 같이 대형차의 경우 무게가 많이 나가서 지하차도를 통과할 때 탄력을 받아서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앞차가 천천히 가게 되면 힘들다고 했다. 내 앞에 여유공간이 많은데 빨리 안 가니까 경적을 울린 거라고. 지하차도에서 2차선으로 간다면 속력을 좀 내주는 게 좋고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승용차가 다니는 1차선으로 미리 옮기는 게 좋다고 했다.
아, 그런 뜻이.. 뒤차에게 미안했다. 이 도로 위엔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의 약속들이 많구나, 생각하며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