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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수빈 Your Celine Jul 25. 2023

매일 성장하는 삶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어떤 삶을 살고 싶으세요?

"어떤 삶을 살고 싶으세요?"라고 누군가 나에게 물었을 때, "매 순간 성장하는 삶이요."라고 답했었다. 과거의 대답은 이러했고, 지금은 다르다. 매 순간 성장하는 삶이 어느 순간 섬뜩하게 느껴졌다. 성장에 가장 잘 어울리는 글자는 '고통'이다. 성장통. 단순하게 어릴 적 겪었던 성장통만 생각해도 '이게 언제 끝나려나'라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다. 내 키는 173cm이다. 한국 여성 평균키인 159.6cm에 비교하면 큰 편에 속한다. 평소 키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고 살지만, 거리를 걸어가다 나보다 키가 큰 여성을 보면 사뭇 어색하다. 하지만 나는 중학교 2학년 때까지 키가 크지 않아 슬퍼하던 아이였다.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무릎이 습관처럼 지끈거려서 심할 때에는 주저앉아 눈물을 찔끔 흘렸다. 키는 안 크면서 아프기만 한 게 억울했다.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 내 키는 12cm를 훌쩍 자랐다. 지금이야 감사한 순간이지만, 그때에는 하루에 2cm가 크는 날에 평균 키를 가뿐하게 넘기자 '여기서 더 커버리면 안 되는데'라는 생각도 했다. 성장통은 그런 것이다. 아픈 당시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 하지만 그 고통은 분명히 결괏값을 품고 있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성장이 클수록 고통도 크다. 


성인이 된 이후에 몸에 느껴지는 성장통은 없었으나, 점점 선택과 책임이 성장의 조건이 되어가며 마음의 성장통이 늘었다. 가장 거센 바람이 부는 순간에 인간은 버티는 힘으로 뿌리가 자라난다. 그리고 멈추지 않을 것 같은 바람이 비로소 잠잠해졌을 때 자신의 뿌리의 깊이를 체감하게 되는 것이다. 부모님에게 사업을 하겠다며 일방적 자취를 통보하고 집을 나왔을 때, 나는 고통을 예상했다. 당장의 월세도 없었기 때문이다. 고통을 기획했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말 그대로 예상이었을 뿐 실제로 닥쳐보니 현실은 더 칼날 같았다. 직접 겪어보기 이전, 나는 나를 믿었다. 아무리 거센 비바람이 몰아쳐도 꺾이지 않는 통나무라고 생각했다. 그땐 몰랐다. 너무 강직하면 부러진다는 것을. 한번 처참하게 부러지고 나니 인간이란 얼마나 깨지기 쉬운 존재인지 자각하게 되었다. 마음이 무너지니 몸을 움직일 수 없었고, 몸을 움직일 수 없으니 마음이 일어나기 힘들었다. 그 순간이 꽤 오랫동안 반복되었다. 두려웠다. 영원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모든 이치가 그러하듯, 지나간다. 그리고 단단해진 나의 뿌리를 온전히 느꼈다. 인간은 유약한 존재임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강해진다. 아픔을 지나오니 성장이 있었다. 그래서 매 순간 성장하고 싶다는 건 어쩌면 매 순간 어려운 삶을 택하겠다는 말인지도 모른다. 성장이 불필요하다는 말이 아니다. 인간은 성장해야 한다. 하지만 평생을 성장의 속도나 정도에 혈안 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어느새 자라 있는 공원의 풀처럼, 때가 되면 피어나는 야생화처럼. 자신의 유약함을 인정하고 부드럽게 성장하자. 안타깝지만 인간으로서 아프게 성장하는 순간은 필연적이다. 어쩌면 운 좋게 고통인지도 모르고 지나갈 수도 있다. 지나오니 언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곤 뒤늦게 예상치 못한 아픔이 몰려오는 경우도 있다. 이 모든 것을 하나의 인간으로서 통제할 수는 없겠지만. 미래의 성장을 위해 현재의 고통을 주입하는 일은 자제하려 한다. 조금씩 반복하며, 주변을 살피다 보니 어느새 곧게 자라 있는 나무가 되겠다. 그렇게 나는 매 순간 성장하는 삶보다 맑아지는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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