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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수빈 Your Celine Oct 14. 2023

삶을 직조하는 마음으로

멈추는 용기가 주는 것들

21년 여름. 어질러진 블록 속 잃어버린 나를 찾겠다며 갑작스런 제주 여행을 떠났다. 오랜 시간 준비한 꿈을 진정으로 내려놓아도 될 타이밍인지. 그렇다면 지금 해야 할 일들은 무엇인지. 밥벌이는 어떻게 할 것인지. 항로를 잃어버린 조종사의 마음이었다. 그렇게 6일간 두 다리로 제주를 걸었고 2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나를 찾는 중이다. 그러나 많은 것들이 달라져있었다. 물론 제주는 변함이 없었다. 


2년 전 첫 번째 묵었던 게스트하우스에는 원데이클래스를 함께 진행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나는 마크라메 만들기를 신청했다. 바다 앞 아늑한 공간에는 긴 머리를 곱게 땋은 게스트하우스 사장님과 나 둘 뿐이었다. 아주 가끔 오는 필(feel)이 있다. 이것이 나의 오랜 물건이 될 것이라는 걸. 그래서 더 정성스럽고 후회 없이 만들고 싶어졌다. 균형을 맞추어 예쁜 격자를 만들고 싶어 힘을 가득 주어 매듭을 지었다. 다 마치고 나니 손가락에 물집이 잡혔다. 결과물은 물집이 아깝지 않을 만큼 마음에 쏙 들었다. 철썩이는 파도소리 앞에 눈물의, 아니 물집의 마크라메를 만드는 나를 보며 사장님은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이걸 볼 때마다 이 순간이 생각날 거예요." 여전히 우리 집 현관에는 이 마크라메가 걸려있고, 사장님의 예언(?)대로 나는 이걸 볼 때마다 그날을 떠올린다. 정확히는 마크라메를 만드는 순간이 아니라 나를 정리하겠다며 제주로 떠난 그 용기를 기억한다. 


그리고 23년 가을. 다시 제주를 찾았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2년이나 지나게 될 줄은 몰랐다. 제주에 하강하는 비행기에서 생각했다. '그때의 수빈 듣고 있니. 나 출장으로 제주도도 오고, 가방에는 내가 쓴 책도 있어. 기특하지?' 가능만 하다면 과거의 나에게 텔레파시를 보내고 싶었다. 그때 처절하게 했던 고민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노라고. 그렇다고 지금 무언가 된 것 같은 기분은 아니다. 다만 알고 있다. 지금의 내가 하고 있는 더 자잘하고 복잡한 고민들도 결국 내일의 더 나은 나를 만든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번 제주의 4일은 이전의 나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다. 얼마나 많은 고민과 용기가 필요했는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마음에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한 카페였다. 2년 전 묵었던 게스트하우스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던 아기자기한 카페였다. 얼마나 아기자기하냐면, 카페 이름이 '토끼네 집으로 놀러 오세요'다. 당시 사장님과 나 둘 뿐이었고, 카페에서 있던 서너 시간 중 두 시간은 글을 쓰고 한 시간은 사장님과 대화를 나눴다. 구체적으로 사장님과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완벽하게 모르겠다. 그 당시 카페를 오픈한 지 얼마 안 되었던 사장님이 새로운 메뉴를 한번 먹어보라며 몇 가지 음료를 내어주셨고, 맛있는 아인슈페너에 대해 얕은 조예를 나눴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내 이야기도 조금 한 것 같다. 혼자 떠난 여행에서 앞으로를 응원하는 친구를 만난 기분이었다. 다음날 나는 서툰 실력으로 카페를 그린 그림을 선물로 드리고 떠났다. 그 이후 지금까지 사장님은 인스타그램의 댓글로 '늘 수빈 씨의 멋진 모습을 응원하고 있다'며 온전한 마음을 보내주셨다. 나에게 유독 특별한 제주의 6일을 함께 기억하는 유일하고 소중한 사람이었다. 


비행기에서 사장님께 드릴 책에 짧은 편지를 적었다. 그 책을 들고 설레는 마음으로 카페 문을 열었다. 사장님은 '어서 오세'에 이어 '요'를 말하는 대신 '어!'라고 말하며 환하게 웃으셨다. 약간은 머쓱한 자세로 "잘 지내셨어요?"라는 안부를 드렸다. 제주에 온다는 이야기는 SNS로 봤는데, 여기까지 찾아온 거냐며 늘 잘 보고 있다고 말하셨다. 나는 여전히 카페에 계셔주셔서 감사하다고 했다. 진심이었다. "카페는 정말 그대로네요. 어쩜 이렇게 깨끗하게 유지하셨어요? 아직도 새 카페 같아요." 다음에 제주에 올 때, 카페가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제주에 카페를 운영하는 게 얼마나 치열한 일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장님께 책을 선물드리는 순간, 카운터에 있는 내 책이 눈에 들어왔다. 카페에서 매일 조금씩 책을 조금씩 읽고 있었다고 하셨다. 나는 아직도 낯선 위치에 있는 내 책을 보면 이상한 기분이 든다. 사장님은 말했다. "저는 수빈 씨가 계속 아나운서 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또 다른 방향으로 더 잘되어서 너무 좋아요. 앞으로 더 더 잘되실 거예요." "너무 감사해요. 저 그때 사실 엄청 고민이 많아서 제주도 온 거였어요. 그래서 더 기억에 남더라고요." "그러셨구나. 그때 정답은 찾으셨어요?" "정답이라기보다는 마음을 먹은 것 같아요. 그런데 그때 카페에서 쓴 글이 이 책에 들어있네요." 


카페의 카운터 벽에는 2년 전 드렸던 그림이 붙어있었다. 종이는 세월의 흐름을 타고 예쁘게 바랬다. 사장님은 음료와 간식을 챙겨주시며, 앞으로도 늘 응원한다는 진심을 전했다. 2년이 흘렀다는 게 무색할 만큼 시간은 빠르고 자연은 그대로였지만. 많은 것이 변한 것도 사실이었다. 오늘의 나를 만드는 것은 어제의 고민들의 총합이다. 어쩌면 여전히 용기가 필요해서 이곳을 찾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때의 나에게 보답하고 싶다는 명목이었지만, 사실은 그때의 나에게 용기를 얻고 싶었나 보다. 그날의 마크라메처럼 매일을 촘촘하고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직조하고 있다. 그 완성품이 어떤 모습일지는 누구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장님의 말처럼 그 완성품들을 볼 때마다 과정의 순간들을 추억하며 다음의 작품들을 나아가는 용기를 얻을 것이다. 


마크라메는 모든 부분을 빈틈없이 채우면 예쁘지 않다. 때로는 물집이 잡힐 정도로 촘촘하게, 때로는 실이 움직일 만큼 넉넉하게 비워두어야 균형을 갖춘 디자인이 완성된다. 그 틈 사이로 좋은 기운이 들어오기 때문에 문 앞에 걸어놓으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니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비움이 있어야 채움이 있다. 복잡하고 괴로울수록 멈추어서 먼 길을 바라보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방향이 정해지면 후회 없이 시간을 채워가야 한다. 결국 우리가 열게 될 문 앞에 근사한 마크라메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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