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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수빈 Your Celine Dec 10. 2023

우리는 모두 번역가의 삶을 산다

적절히 이해하고 적당히 생존하기 위해 

학창 시절 나를 괴롭혔던 일 중 하나는 영어 단어 암기였다. '하루에 30개씩 외우기'를 거진 10년 동안 고정 스케줄로 지정했으나 뿌듯하게 수행한 날들이 많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학원에서 단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해 울며 겨자 먹기로 머릿속에 단어들을 욱여넣곤 터덜거리는 발걸음으로 건물을 나왔다. 암기에 취약하다는 것을 그때부터 깨달았다. 오랜 시간이 흘러 지금은 그런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럼에도 휘발되지 않고 오랜 기간 진하게 떠오르는 단어가 몇 가지 있다. 우리나라 말로는 한 단어로 설명되지 않는 표현이거나, 그 시절 한국어로도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단어들이 그렇다. 그중 하나가 바로 'bilingual'이었다. 우리말로 '두 개의 언어를 사용할 줄 아는' 혹은 '이중 언어 사용자의'라는 뜻이다. 명사형인 'bilingualism'은 '2개 국어를 사용하는 능력'이다. 영어가 세계 공통어라 고유어와 함께 사용하는 나라들이 많이 존재하기에 만들어진 단어가 아닐까. 우리나라에는 이와 동일하게 쓰는 '단어'는 없으니 말이다. 


언어라 함은 단순히 소통을 위한 글자 정도를 의미하지 않는다. 한 지역 혹은 국가의 몇십, 백 년간에 걸쳐 생성된 문화의 농축물이다. 그러니 두 개 이상의 언어를 완벽히 구사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문화를 몸으로 체득해야 한다. 사실상 약 100년의 수명을 가진 인간에게는 하나의 언어도 완벽하게 구사하는 게 결코 수월하지 않다. 현재 전 세계에서 사용하는 언어의 수는 7,151개라고 한다. 그중 40% 정도는 멸종할 위기이며 1,000명 이하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도 여럿 존재한다. 언어는 한 세계를 담는다. 이 수많은 언어를 구사하는 인간은 이동하고, 소통하고, 감정과 지식을 향유한다. 이 중간다리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번역가'이다. 


번역을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문화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혹은 탐구가 정도의 태도는 가지고 있어야 이상적인 번역에 다다를 수 있다. 단순히 사전처럼 언어를 전환하는 역할이라면 번역가가 아닌 '전환가'가 어울릴 것이다. 번역은 언어의 필라멘트다. 언어와 언어의 연결을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따져보면 우리는 모두 번역가의 삶을 살고 있다. 각자의 세계에 살고,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수혈되는 언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50년대에 태어난 사람과 90년대에 태어난 사람의 언어는 다르다. 기업의 3년 차 직장인과 10년 차 간부 직장인의 언어는 다르다. 대형병원에 갓 취직한 간호사와 그에 입원한 고령 환자의 언어는 다르다. 하지만 우리는 매 순간 연결되어 소통한다. 적절히 이해하고 적당히 생존하기 위해서 매 순간 상대의 언어를 번역하며 살아간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생존 번역가다. 벌써 7년 차 직장인 A 씨는 회사 임원에게 쓴소리를 듣고 나서 10년 차 과장에게 이를 전달할 때 '과장님의 일 스타일이 별로라고 화내셨습니다'라고 직역하는 것이 아닌, '아유 윗분들 아시잖아요~ 과장님 우리 조금만 더 맞춰봐요!'라고 너스레를 떠는 번역 내공이 생긴다. 각자의 생존을 위해 번역력이 자리한 것이다. 번역의 시작은 상대를 배려하는 태도에서 나온다. 언어가 다른 두 상대방, 혹은 나와 상대방을 온전히 이해하고 바라봐야 한다. 한 세계를 공유하는 우리는 모두 2개 이상의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bilingualism)은 물론이거니와, 나와 타인의 존중을 위해 수백가지의 언어를 습득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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