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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수빈 Your Celine Jul 08. 2024

친절함은 늘 익숙함을 이겨야 한다

중년의 결혼생활을 꿈꾸며 

종종 결혼생활에 대해 고민한다. 여기서 초점은 '결혼' 그 자체보다, '생활'에 있다. 결혼을 한지 얼마 안되었을 젊은 시절보다, 2-30년이 지난 시점의 결혼생활을 주로 상상하게 된다. 진짜 서로가 필요한 건 어쩌면 그때가 아닐까? 나이가 들어서도 절대 잃고 싶지 않은 것 중 하나는 바로 가장 소중한 사람과의 사랑이다. 비혼주의가 아닌 나로서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오랜기간 유지하는 것에 대한 적당한 로망과 원대한 책임감을 갖고 있다. 하지만 두 커플 중 한커플이 이혼한다는 개인적 데이터에 의한 소문(?)이 들려올 정도로 서로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대한 노력 혹은 기대감이 줄어든 것이 현실이다. 이제는 이혼을 한다는 것이 더이상 사람에 대한 흠이라고 여겨지지 않고, 충분히 '이해 가능한' 영역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30년차가 다 되어가는 우리 부모님의 결혼생활을 가장 가까이서 본 소감으로서,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만나서 몇 십년에 걸쳐 하나의 세상을 온전히 유지하는 일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흔히 '중년부부'라 함은 애정보다는 정으로, 관심보다는 책임으로 서로를 대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인간관계란 어떤 사이든 시간의 축적에 따라 처음의 호기심과 낯선 감정은 사라지고, 자연스러운 에너지가 자리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익숙함은 때때로 서로에게 권태라는 이름으로 소리없는 무기가 되기도 한다. 반대로 말하면 관계의 온기를 오래도록 유지하는 사람들은 부지런하다. 다정함은 노력이자 능력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영어 회화를 제대로 공부하고 싶다는 의지가 생겨 영어 회화학원을 등록했다. 이곳이 마음에 들었던 이유는 딱 하나였다. 딱딱한 학원 강의실에서 언어를 주입하는 것이 아닌, 카페같은 오픈된 공간에서 테이블별로 앉아서 대화를 하며 영어를 익히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교재의 정답보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점이 기대되었다. 비교적 널널한 평일 낮시간으로 수업을 등록했다. 수업 첫째날이었다. 나의 테이블을 배정받고 빈 자리에 앉았다. 20분 일찍 도착한 터라 아무도 도착하지 않았고, 낯선 공간의 분위기를 적응시키려 눈동자를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 한 할머님이 다가오셨다. "안녕하세요." 가볍게 미소를 담은 인사를 나누고 옆자리에서 가방을 정리하던 할머님은 꺼내려던 필통을 내려놓았다. 다시 고개를 들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씀하셨다. "저 미안한데, 혹시 제가 이 자리에 앉아도 괜찮을까요? 왼쪽 귀가 안들려서 왼쪽에 앉아야 말을 잘 들을 수 있을 거 같아요. 아유 미안해요." "아! 아니에요, 여기 앉으세요. 괜찮습니다." "하하하. 아이고 미안해요." 이후 이야기를 나누면서 할머님의 연세는 74세이고, 노인을 위한 재미없는 패키지 여행이 아닌 자유 여행을 다니고 싶어서 영어를 배운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할머니의 영어 이름은 '세실리아'였다. 


다음은 60대 중년 부부가 우리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그들의 영어 이름은 '줄리'와 '윌'이었다. 줄리는 입꼬리를 활짝 올리고 웃으며 "아! 오늘 처음 오셨구나~ 웰컴 투 아월 클래스! 나이스 투 미츄~!"라고 소녀처럼 명랑히 인사를 건네셨다. 순간 "땡큐"라고 해야할지 "감사합니다"라고 해야할지 헷갈렸지만, 처음만난 어른에게 '땡큐'는 왠지 버릇이 없는 것 같아 머쓱한 한국어를 택했다. 평일 오전의 수업은 대부분 연령대가 높았다. 나를 제외한 가장 젊은 나이는 40대였다. 그래서 흥미로웠다. 나이대가 다양한 어른들과 비슷한 수준의 영어 대화를 할 수 있다니! 영어보다 더 다양한 것들을 배울 수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정확한 예감이었다. 나는 이날 줄리와 윌 부부를 두어시간 내내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60대 중반의 중년 부부가 이토록 서로를 칭찬하는 모습은 처음 봤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서로의 오른쪽에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영어 예문을 만들어보는 시간이었다. 써야하는 표현은 'could have been(~했을 수도 있었을텐데)'였다. 윌은 줄리를 보고 활짝 웃으며 "I could have drinken coffee with julie in the morning. (나는 아침에 줄리와 커피를 마실 수 있었을텐데)"라고 말했다. 진심으로 그 사실을 아쉬워하며 말하는 것이 느껴졌다. 다른 표현에서 줄리는 "He reminds me of 주윤발.(그는 나에게 주윤발을 떠올리게 해)"라고 말하곤 서둘러 "when he was young! really! (젊었을 때! 정말이야!)"를 외치며 두 눈을 크게 뜨고 웃었다. 이밖에도 두 사람의 환한 인상과 서로에게 말하는 다정한 말투가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중년 부부의 대화가 이렇게 부드러울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이 모습은 사랑에 빠졌다기 보다는, 여전히 서로를 조심스러운 존재로 생각하는 남다른 배려에 가까웠다. 두분이 영어공부를 하는 이유는 세실리아와 같았다. 함께 자유여행을 더 많이 다니고 싶어서 여기에 왔다고 말했다. 자식들을 모두 키워놓은 후, 둘만의 여행을 위해 매일 영어학원을 함께 다니는 윌과 줄리의 일상은 성공한 삶이 아니면 무엇일까... 나는 이들을 보며 평생 서로에게 친절한 결혼생활을 꿈꾸게 되었다. 나이가 들고 소중한 사람과 익숙해질수록, 그에게 오히려 비일상적 친절을 베푸는 태도가 필요하다. 굳이 하지 않아도 문제가 없는 따스한 말을 골라서 건네고, 때로는 예기치 못한 감동을 주는 귀찮음을 이겨내는 일들이 사랑을 유지하게 만든다.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기에 귀하다. 오랜 관계일수록 친절함은 늘 익숙함을 이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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