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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크나인 Jan 25. 2021

맵부심의 DNA

아찔한 손맛

“난 청양고추도 고추장에 찍어먹어”


맵기로 유명한 라면 광고에서 매운 음식을 잘 먹는다며 으쓱하는 모델이 한 말이다. 결연한 의지를 표명한 채 라면을 호로록 먹지만 이내 머리 위로는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얼굴은 심하게 붉어진다. 하지만 맵부심으로 똘똘 뭉친 그녀는 “뜨거워서 그래, 뜨거워서”라는 최소한의 자존심을 남긴다.


'맵부심'은 매운 것을 참고 잘 먹는 것을 과시할 때 쓰는 신조어다. 매움을 뜻하는 '맵'과 자부심의 '부심'이 합쳐졌다. 나 또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매운 음식을 좋아하고 잘 먹는다. 솔직히 주변에서 나보다 매운 음식을 잘 먹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회사 동료들과 지방 출장 갔을 때다. 업무의 특성상 출장이 잦았고, 1년에 두어 번씩 출장을 가는 지역이라 주변 맛집을 줄줄이 꿰고 있을 정도였다. 보름 동안 머물렀던 적도 있었으니 오죽했으랴. 그날의 저녁 메뉴는 매운 갈비찜이었다. 매운 정도를 선택할 수 있었는데 순한 맛의 1단계부터 아주 매운맛의 8단계까지 고르게 퍼져 있었다. 매운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 직원들은 보통맛의 3단계를 주문했다.


보통맛을 주문한 동료들이 나와 다른 직상 상사에게 매운 음식을 잘 먹으니 제일 매운맛으로 먹어보라고 권했다. 직상 상사와 나 사이에 묘한 신경전이 펼쳐졌다. 그분도 매운 음식에 일가견이 있는 분으로 우리 둘은 회사에서 매운맛을 가장 잘 먹는 2인으로 이미 소문이 나 있었다.


나는 동료들의 권유에 “에이~ 괜찮아. 그냥 중간 맛으로 할게~”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그분은 “그럴까?”라고 답했다. '가장 매운맛을 드신다고?' 나보다 13살이나 많은 나이지만 깡마른 체형에 웃는 얼굴 뒤로 숨겨진 위세가 대단해 보였다. 그분은 청양고추와 고추장을 달고 사신다. 된장은 입에도 대지 못하는 대신 어느 식당을 가더라도 제일 먼저 찾는 음식이 청양고추와 고추장이다. 게다가 남자가 아닌 여자가 그런 말을 하니 감춰져 있던 나의 맵부심이 슬그머니 어깨 위로 올라왔다.


“하하~ 저는 괜찮은데 괜찮으시겠어요? 뭐 괜찮으시다면 8단계로 가시죠~”로 화답했다. 다른 직원들이 시킨 3단계의 갈비찜이 먼저 나왔다. 찌그러진 양은냄비 속에 빨간 양념과 함께 고개를 든 갈빗대가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이어서 이 집에서 가장 맵다는 공포의 8단계 매운 갈비찜이 등장했다. 8단계의 위엄은 대단했다. 검붉은 양념이 굉장히 위협적이었다.


당황한 기색을 접어두고 가스레인지에 불을 켰다. 보글보글 끓고 있는 8단계는 더욱 까맣게 변해가는 것 같았다. 어느 정도 익은 뒤 그분이 먼저 국물을 한 입 떴다.


그분은 “앗!!!” 외마디 비명 소리를 지르며 “맵다. 매워, 8단계 맞네”라고 꼬리를 내렸다.


두려움 반, 자신감 반의 심정으로 나도 한 숟가락 떠서 입으로 가져다 댔다. 혀가, 입 속이 아팠지만 그래도 참을 만했다. 그분은 8단계를 먹다가 중간에 포기했지만 나는 고기를 다 건져 먹은 뒤 밥까지 쓱쓱 비벼먹었다. 직원들이 박수를 쳤다.


 승.리.했.다.


 타들어가는 가슴이었지만 전쟁터에서 적군을 물리치고 무사 귀환한 장수처럼 기뻤다.


 내가 매운 것을 거부감 없이 잘 먹게 된 데는 어머니의 영향이 절대적으로 크다. 맵부심 또한 어머니의 DNA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어머니는 손이 매웠다. 누군가 어머니가 차린 음식이 맵지 않다고 하면 눈빛이 달라질 정도였다. 한 가족의 입맛은 끼니마다 음식을 준비하고 만드는 '엄마 손맛'을 따라간다.

어머니의 음식은 맵고 자극적이었다. 매운 음식을 먹으면 스트레스가 풀리고 삶에 활력이 생긴다는 것이 어머니 지론이었다. 그러다 보니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자연스럽게 배추김치는 물론 고들빼기와 오이소박이, 파김치, 갓김치를 거부감 없이 접했다.


우리 집 음식이 맵다는 걸 안 것은 고등학생 때다. 태어나서 줄곧 먹어온 음식이라 맵다는 생각은 크게 해보지 않았지만 친구들이 그 사실을 일깨워줬다. 외출로 부모님이 안 계신 주말, 친구들과 영화를 보기 위해 비디오 대여점에서 액션 영화를 빌려 집으로 향했다. 한창 영화를 보던 중 한 친구 녀석이 배고픔을 호소했다.


나는 친구들을 위해 밥을 펐고 냉장고 속의 배추김치와 부추김치를 꺼내 식탁에 올렸다. 미역국도 데운 뒤 식탁에 둘러앉았다. 나는 부추김치를 굉장히 좋아한다. 젓가락으로 한 움큼 집어 밥에 싸 먹으면 찌릿한 맛이 입안을 감싼다. 내가 좋아하는 부추김치를 친구들에게 권했다. 한 친구가 밥 한술 뜨고 부추김치를 먹고는 “으앗!!!” 하고 소리를 질렀다. 우리는 '돌이라도 씹은 거냐'며 깜짝 놀라 물었다.


“으아, 으아, 매워, 매워, 물 물!!” 그 친구는 김치가 너무 맵다고 했다.

다른 친구들은 김치가 매워봐야 얼마나 맵냐, 오버하지 말라고 핀잔을 주며 배추김치와 부추김치를 집어 입안에 넣었다. 한 친구는 입에 넣자마자 “윽..”하고 짧은 비명을 냈고 다른 한 친구는 조용히 씹으며 잘 참는가 싶었지만 이내 물을 들이켰다.


“애기구만, 애기야” 나는 보란 듯이 배추김치와 부추김치를 밥 위에 올린 뒤 한 번에 집어 입에 넣으며 말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친구들은 우리 집 김치가 역대 최고였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혀는 매운맛을 느낄 수 없다. 입안의 뜨거운 고통이 매운맛이다. 꾸준히 매운 음식을 먹어온 나는 그만큼 단련이 됐던 것이다. 아픈 기억도 있다. 군대에 가서 첫 휴가를 나왔을 때다. 천편일률적인 군대 음식을 뒤로하고 엄마의 매운 손에 의해 탄생된 부추김치를 한없이 먹고 싶었다.


집밥 생각에 부모님께 거수경례를 마치자마자 식탁으로 향했다. 식탁 위는 마치 불이 난 것처럼 시뻘건 음식들로 가득했다. 엄마는 맵부심 가득한 아들을 위해 더 맵게 부추김치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침이 고였다. “잘 먹겠습니다”를 외친 뒤 바로 부추김치부터 한입 했다.


오랜만에 운동을 하면 다음날 몸 구석구석 알이 배는 것처럼 붉은 고춧가루를 머금은 부추김치는 5개월 만에 입속으로 들어와 불을 질렀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먹다 보니 적응이 됐고 참된 매운맛에 상쾌함을 느꼈다.


허겁지겁 먹다가 부추김치의 부추 한가닥이 왼쪽 볼에 붙었다. 아무 일 없는 듯 나는 손으로 떼어 입에 넣었다. 5초 정도 흘렀을까? 부추김치가 잠시 머물렀던 왼쪽 볼에 타는 듯한 알싸함이 전해졌다. 밥 먹다 말고 일어나 세수를 했다. 너무 따가웠다. 입안은 매운맛을 빠르게 적응했지만 피부는 처음 느껴폰 아찔함에 깜짝 놀란 모양이다.


어머니의 강렬한 손맛에 힘입어 아버지도 그리고 남동생도 매운 음식을 잘 먹는다. 잘 먹는 것과 좋아하는 것은 다르다. 매운 음식을 잘 먹는다고 허구한 날 매운 것만 먹지는 않는다. 칼칼한 맛이 당기는 날이 있고, 달달한 케이크가 먹고 싶은 날도 있다.


한 날은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건의 아닌 건의 사항을 밝혔다. 국이 있어야 식사를 하시는 아버지는 “아침에는 빨간 국물이 아닌 하얀 국물이었으면 좋겠다”라고 하셨다. 아침에는 좀 덜 맵게 먹자는 뜻이었다. 어머니는 알겠노라고 한 뒤 다음 날 하얀 국물의 오징어 뭇국을 끓이셨다. 아버지는 “그렇지. 얼마나 좋아~”하고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국물을 한 숟가락 뜨셨다.


부모님 댁에는 잘 다져진 청양고추가 항상 냉장고 한편에 자리하고 있다


“윽!!” 아버지는 입을 가리면서 비명을 질렀다. 자세히 보니 하얀 국물 아래 푸른 청양고추와 고추씨가 보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부탁처럼 빨간 고춧가루를 넣지 않았지만 청양고추를 어마 무시하게 썰어 넣었던 것이다.


“뭘 맵다고 해. 하나도 안 맵구먼.”

어머니는 국물을 마시며 아버지에게 핀잔을 줬다.


2021년 새해 들어 동생과 함께 오랜만에 부모님 댁에 모여 식사를 했다.


동생은 업무의 특성상 겨울이 되면 해외로 나갔지만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그러지 못했다. 동생이 겨울에 나가지 않은 것은 7년 만이다. 오랜만에 온 식구가 모이자 하하호호 웃음소리가 문틈 밖으로 끊임없이 새어나갔다.


어머니가 준비한 음식은 오징어국수와 떡국이었다. 오징어국수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가 자주 해주시던 음식이다. 오징어를 데치고 볶아 삶은 면에 부어 먹는다. 핵심은 오징어볶음이다. 고춧가루와 청량고추가 듬뿍 들어가 알싸하면서 칼칼한 맛을 자랑한다. 오랜만에 어머니의 매운 손맛을 본 나와 동생은 연신 “스읍, 스읍...” 매운맛을 날려가며 국수를 흡입했다.


그때였다. 한 젓가락 드신 아버지는 “에이, 생각보다 안 맵네~”라고 하셨다.

“음... 그래?” 어머니의 눈빛이 약간 흔들리면서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표정을 숨기지 못하셨다.


'이러면 안 된다' 동생과 나는 눈빛을 교환한 뒤 아버지를 말렸다. 큰일 난다고..

“아니에요. 딱 맛있는 매운맛이에요~ 역시 엄마의 손맛은 안 변했어요, 최고예요~”


어머니 앞에서 어설픈 맵부심은 절대 금물이다.


“그렇지? 다행이네. 많이 먹어~ 우리 아들들~”


엄습했던 차가운 공기는 이내 물러가고, 다시금 따스한 기류가 집안을 감싸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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