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아지는 빗속에서 박자를 찾아 걷는 길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흥겨운 라틴음악
살짝 훔쳐본 그림은
세상 어느 풍경보다 아름답던
노부부의 살사댄스
트리디나드의 하늘은 오늘도 맑았다. 노랗고 파란 집들은 어제와 다름없이 햇빛에 반짝였다. 나뭇잎은 초록빛에 눈을 깜빡였다. 말과 개들은 쨍쨍한 태양 아래 달궈진 흙길을 가볍게 걸어 다녔다. 반바지 차림으로 강렬한 햇빛과 시원한 바람을 나눠 갖으며 하늘을 한번 더 바라보는데 세상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커다란 구름 뭉치가 보인다. 얼마 후 한 방울, 두 방울 빗방울이 떨어지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졌다. 한국이었다면 비를 피해 도망가기 바빴겠지만 먼지 하나 없어 보이는 이 마을에서는 빗물에 샤워를 하고 싶은 마음이 피어났다. 장대비를 개의치 않고 맞으며 까사로 향했다. 몇몇 경사가 낮은 골목길은 계곡이 된 듯 발목까지 오는 물살이 생길 정도의 폭우였다.
오랜만에 비소식인지 마을 사람들도 구멍 난 하늘을 구경하다가 웃옷을 벗고 흥겨운 걸음으로 비를 맞는 이방인을 발견한다. 장대비보다 더 귀한 장면이 꽤나 재밌었는지 함박웃음을 지으며 박수를 쳐준다. 비가 아무리 깨끗해도 장대비에 샤워하는 모습은 분명 정상적인 행위가 아닌 것이다. 쿠바의 성난 하늘은 수압 좋은 샤워기였다. 마을 사람들의 응원을 받으며 시원하게 까사 앞에 다다른 순간 거센 빗소리를 뚫고 흥겨운 라틴음악이 들려온다. 파티하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 아닌가 싶어 안을 들여다보니 한 노부부가 음악에 맞춰 함께 살사댄스를 추고 있었다.
장대비, 라틴음악, 노부부의 합 좋은 살사댄스.
잘 만든 영화의 엔딩에서 볼 법한 장면이었다.
그들도 내가 궁금했는지 춤을 마치고 나에게 다가왔다. 서로 언어가 잘 통하지 않았기에 몸짓을 거창하게 이용해야 했다. 할아버지는 90세, 할머니는 82세이시며 결혼한 지는 70년이 되었다는 부부였다. 할머니는 귀가 거의 들리지 않아 할아버지는 입 모양과 간단한 수화를 이용해 할머니와 대화를 했다. 아주 어릴 때 결혼하여 혁명과 냉전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살사댄스를 추었고 어느새 노부부가 된 그들이었다. 대화는 비가 멈출 때까지 이어졌다. 배우자와 70년 간 함께하는 살사댄스라니. 참으로 낭만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결혼이 아득히도 먼 중학생 때, 사랑이라는 감정도 제대로 모르는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을 한 적이 있다. 사춘기도 끝나지 않은 어린 학생의 귀여운 투정이자 섣부른 판단이었지만 중학생의 다짐은 꽤나 길게 지속되었다. 배우자와 아이가 있을 때 가져야 할 책임이 너무나 무겁다고 생각해 겁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배우자를 책임감이 아닌 인생의 동행이라 생각하고 같이 성장하는 시각을 가질 수도 있었지만 책임감이라는 짐은 쉽게 떨쳐지지 않았다.
이후에도 간혹 결혼에 관한 가치관을 주제가 나올 때면 ‘결혼 안 한다고 하는 놈들이 제일 일찍 하더라 ‘ 등의 반론을 자주 들었고 대부분 맞는 말이었다. 나 또한 입사 이후 아주 단단했던 결혼에 관한 부정적인 생각에 금이 갔다. ‘결혼을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랫동안 고민했다. 결혼 후 평범한 삶을 살 것인가. 회사를 그만두고 혼자 끝없는 여행을 떠날 것인가.
선택은 후자였고 쿠바의 트리니다드에서 혼자 비를 맞고 뛰어다니고 있다. 결혼한 가정에서 안정된 삶을 사는 나와 지구 반대편에서 혼자 알 수 없는 길을 걸어가는 나. 한 번의 선택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정반대의 생을 살아가게 한다. 무엇이 더 좋은 선택이었을지는 알 수 없다. 결혼할 기회를 놓친 것에 대해 아직 후회되지는 않지만 어쩌면 오늘은 결혼하지 않은 후회를 미리 경험한 날이 될지도 모른다. 다만 어떤 선택을 해도 후회는 있고 정답은 알 수 없다. 비를 맞으며 자유롭게 뛰어다닐 수 있었던 오늘의 삶에 감사하며 나의 길을 감히 기쁘게 걸어가야겠다.
홀로 장대비 속을 기쁘게 뛰어다니는 이에게 70년을 함께한 그들을 만난 것은 동경이자 부러움이었다.
여행하며 만난 어느 풍경보다 빛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내일은 비가 오지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