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어딘가 문제가 있음은 알고 있었다. 이미 끝없이 자책하고 후회하고 있었고, 분노와 무력감으로 넘치고 있던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느꼈고, 비록 도피처였지만 특정한 목표를 가지고 다시 의욕을 불태울 수도 있었다. 어찌 되었건, 결국은 내가 알던 '나'라는 존재는 이미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내가 인식하고 있던 상태보다 너무나 안 좋았다. 내가 나를 인정할 시간조차 없이 진짜 나의 상태를 직면한 데다가, 애써 외면했고 직접 경험한 적 없는 현실을 직접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런 일들이 지나고 나서 몇 주 정도는 오히려 의욕적으로 움직였다. 지금은 영국으로 떠나지 못하지만, 박사과정부터는 장학금을 받으며 영국에서 학위를 받겠다는 목표를 가졌다. 혼자 공부하겠다며 인터넷 강의를 수강하는 게 전부였던 과거의 태도를 버리고 학원이나 과외를 찾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타인을 만날수록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내가 더욱 선명히 느껴졌다. 오래 지나지 않아 그런 의욕은 사라졌고, 이전보다 더 깊은 심연으로 곤두박질쳤다.
감정의 밑바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책과 후회였고, 내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죄책감과 분노뿐이었다. 그저 누워서 쉬지 않고 과거를 돌이키며 내가 내렸던 모든 결정을 후회하고 자책하기를 반복하는 것 외에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 상태를 겪어보지 않은 이에게 설명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이 상태가 너무나 고통스러워 무엇이라도 하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생각에 압도되어 몸을 움직일 수는 없다. 더욱 심각한 날에는, 그런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조차 못 하는 채로 끊임없는 고통을 느껴야만 한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스스로 던지는 질문은 한 가지 주제로 관통한다. '나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치료의 효과가 나타나기 이전에는 이 질문을 그저 되풀이하며 자책했다면, 치료 효과가 나타나면서부터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 애썼고, 지금도 애쓰는 중이다. 지금의 내가 만들어진 이유에 대한 수많은 생각과 가설이 스쳐 지나간다. 불합리한 일이 많더라도 학교에 다니며 '정상'인 삶을 살았다면. 학교에서 받는 스트레스에 대처할 정신력을 친누나에게 받는 스트레스에 대처하기 위해 사용한 것은 아닐까. 너무 어린 나이에 혼자 살기 시작한 것이 이유일까? 내가 영재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학교에 흥미를 느꼈다면. 사람에 무관심함은 영재성에 뒤따라온 것인가, 별개인 것일까.......
한 가지 다행인 점이라면, 내가 완전히 변해버렸음을 알게 되고 나서 너무 늦지 않게 병원을 찾아갔다는 점이다. 독립한 이후 처음 우울함을 겪고 체중의 10%가량을 잃으며 우울증을 가리키는 대부분의 증상을 이미 만족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때부터 우울증이라는 병을 어느 정도 고려하고 있었기 때문에 병원의 도움을 받기로 결정할 수 있었다.
물론 감기에 걸려 동네 의원을 찾아가듯 하지는 못했다. 먼저 치료를 받을 의욕조차 나지 않는 자신을 설득해야 했고, 다음으로는 부모님을 설득해야 했다. 부모님께서는 큰 반대 없이 병원에 갈 수 있도록 도와주셨지만, 정신적인 버팀목이 되어 주시진 않으셨다. 또한 찾아간 곳이 대형 상급 병원이었기 때문에 상담이 이루어지기보다는 증상에 대한 약물 처방이 우선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 감정을 정리하고 사색하는 일은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초기 나 자신에 대한 자책과 후회는 시간이 흐르자 존재론적인 고민과 허무주의로 바뀌어갔다. 프랑스의 한 임상심리학자는 영재 청소년의 우울증을 가장 빈번하고 지속성이 강하며 우려할 만한 수준인 심리적 장애라고 언급하며, 그 양상으로 생각을 멈추는 '공백 우울증'과 삶의 의미에 대해 회의감을 갖는 '의미에 대한 질문'을 들었다. 1) 바로 그런 생각들이 나를 괴롭혔다. 죽음이란 무엇일까, 우연의 일치로 어느 순간 존재하게 된 내가 무언가를 할 필요가 있을까? 무엇을 한다고 한들 의미가 없으니, 삶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미 삶은 고통의 연속체가 되어버렸는데, 죽음이 완전한 안식을 취할 수 있는 해결책이 아닐까. 무의미함, 죽음 등의 생각이 너무 깊어졌고, 도저히 멈출 수 없는 무의미함에 대한 생각을 '죽이고' 싶었다.
어떤 두 행동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우린 여러가지를 따진다. 이익, 향후 전망, 두려움 등등. 이런 말이 많이 나돈다. 자살할 용기로 세상을 살아보라고. '자살할 용기'라. 애초에 자살이란 행동을 쉽게 하는 사람은 없다. 현실과 죽음을 비교해서 둘중 더 나은쪽을 선택 하는거다. 자살을 하고 나서, 그 직후, 예를 들어 옥상에서 떨어지면서 살고 싶다고 생각하거나, 물에 빠져서 구해달라고 소리칠때, 그건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가 현실에 대한, 삶에 대한 공포를 이겼기 때문이다. 죽음이 임박한 순간에서도 여전히 삶의 공포가 더 크거나, 살아나지 못했을 경우는 죽는다. 살아 나더라도, 후에 다시 자살을 시도하겠지. 이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알고 있으면서 그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걱정하는 사람을 욕해선 안된다. 모두가 그런적이 있고, 또한 그러고 있으며, 단지 그 해결과정에서 겪게 될 일들의 두려움이 현재 그 문제가 존재하는 현실의 두려움보다 클 뿐이다. 자살자도 마찬가지로, 현실의 두려움이 죽음의 두려움을 넘어설때, 자살을 시도한다. 삶을 충분히 비관하면서도 자살을 시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겁쟁이가 아니다. 현실에 남은 미련과 원하는 것들이 현실의 두려움을 줄이기 때문이다. 그건 용기로 극복할 수 있는게 아니다. 애초에 자살에는 용기란 없는것이다. 덜 고통스러운 곳으로 가는 것인데, 어떤 용기가 필요하단 말인가. 이런 경우에는 더 고통스러운 현실에 있는것이, 살아있는것이 용기 있는 행동인 것이다.
2016년 6월
죽음은 끝이다. 이 사실이 내가 어떤 일을 할 의지를 사라지게 만든다. (...) 내 미래는 명확하다. 수천, 수만가지의 경로가 있을것이다. 연구원이 될수도, 평범한 직장인이 될수도, 공무원이 될수도 있다. 하지만 끝에 가서는, 은퇴하고, 아프고, 죽을것이다. 지켜보는 이 없이 죽게 되겠지. 죽고 나서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것이다. 이 때에 이르면, 나는 '나'가 아니라 그저 생물체A가 된다. 결국 남는건 아무것도 없을 거라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미래는 허망하다.
2016년 7월
References
1) Jeanne Siaud-Facchin, 장미애 역, "영재의 심리학", 와이갤리,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