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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avus Nov 08. 2020

29. 우울증 치료의 효과

  내 우울증의 원인에 비록 영재성이 상당 부분 기여했더라도, 엄밀히 따져 '영재성의 병리'는 아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글에서 다루었던 다른 주제처럼 하나의 글로 간단하게 언급하고 넘어가지 않는 것은, 우울증은 영재성이 불러오는 '가장 완전하고 복합적인 형태'(영재의 심리학, 302p)의 병리 상태라는 표현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더하여, 나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게 한 출발점이기도 하다. 코로나바이러스라는 상황과 맞물려 코로나 블루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질 만큼 이제야 우울증에 대한 기초적인 인식이 생겨나고 있는 시점에서, 이유는 다르더라도 같은 우울증을 겪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한다. 영재와 우울증이라는 잘 다루어지지 않는 주제에 대해 자세한 기록을 남기는 것은 덤이다.



  심각하게 망가진 나를 발견하고 병원으로 향했다. 독립한 초기에 10%가량 잃었던 체중을 또다시 5% 정도 일었다. 키에서 100을 뺀 값과 몸무게의 차가 17에 달했다. 매일 12시간 이상 잠으로 보냈는데, 잠을 자면서는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밝은 빛이 싫어 항상 커튼을 치고 살았고, 이전에 그토록 좋아했던 취미는 전부 손에서 놓아버린 지 오래였다. 내가 좋아하는 것조차 할 의지가 없는데, 해야 하는 것들을 못 하는 것은 당연했다. 과거를 끊임없이 곱씹으며 나 자신을 원망했고, 미래를 끊임없이 불안해했다.




투약과 치료


  병원에서 종합 심리검사를 받고 받은 진단은 적응장애와 주요우울장애였다. 그에 맞추어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진정제는 나를 원망하며 생기는 분노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잠재워줬다. 불안에 떨며 분노하는 감정은 사그라들었지만, 여전히 과거에 사로잡혀 후회하며 우울해하고, 허무주의를 느끼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우울증 치료제로 많이 처방되는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SSRI)는 즉효를 느끼지 못하며, 그 효과를 느끼기까지 꽤 긴 시간이 필요하니 약효가 나타나기까지 기간을 잘 버티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그 시기를 부모님과 함께 노력해서 지나갈 수 있었다. 심각한 과민성 대장 증후군 때문에 이내 그만두기는 했지만, 아버지께선 매주 주말 동네에 산책하러 함께 나가주셨다. 거의 매일 본가에 찾아가면 어머니께선 정성 들여 식사를 차려주셨고, 어머니, 그리고 강아지와 시간을 보내다 돌아가고는 했다. 본가에 다녀오는 길을 걸으며 생각을 정리하는 것도 도움이 됐으며, 규칙적인 운동의 효과도 있었을 것 같다. 


  그렇게 약을 복용하기 시작한 지 서너 달이 지나자, 내 상태는 나 자신이 느낄 수 있을 만큼 좋아졌다. 다 놓아버린 취미에 다시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가장 처음 시작한 것은, 내가 먹고 있는 약의 작용 기전을 공부하는 것이었다. 옛날부터 해보고 싶었던 실험을 조금씩 다시 시작하고, 아주 조금이나마 수능 공부를 다시 잡기 시작했다. 


  약의 효과가 나타나 아무것도 못하는 상태에서는 벗어났지만, 이 시기 나는 공허했다. 대게 공허하다는 말은 부정적으로 쓰이지만, 이때의 나한테 만큼은 긍정적이었다. 강렬한 후회와 분노, 불안이 사라지고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평온함이 너무나 좋았다. 행복하다고 물어본다면 전혀 그렇지 않지만, 이전과 비교해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작아진 부정적인 감정들이 상대적인 행복이었다.


그간 나는 깨어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걱정하면서 보냈다. 과거-현재-미래에 대한 걱정들, 정말 끝없이 걱정했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한걸 여기에 적었다. 요 며칠들어서, 또는 최근 몇주-그래봤자 2주정도가 최장일것이다.-간 우울감이 거의 들지 않았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걱정도 매우 크게 줄었다. 오늘은 요즘 근황과 했던 생각들, 나의 변화에 대해서 적어보려고 한다. (...) 지금은 아무 감정도 없다. 솔직히 말해, 행복한건 아니다. 하지만 나를 짓누르던 부정적 감정들이 무시할 정도로 작아진 상태가, 상대적인 행복으로 느껴질수는 있을것 같다. 

2016년 10월



  수년간의 긴 터널을 지나, 이제야 다른 무언가를 해볼 용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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