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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avus Jan 24. 2021

37. 능력 숨기기


  능력을 숨긴다니,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는 일상에서 많은 사람이 행하고 있기도 한데, 어떤 이유에서든지 자신의 강점을 숨기는 것이 곧 능력 숨기기이기 때문이다. 업무에서 과한 책임을 지게 될까 봐, 과한 기대를 받게 될까 봐, 혹은 단순히 관심을 받고 싶지 않아서... 이러한 심리는 영재에게도 마찬가지다. 영재성이란 선망과 질투를 동시에 받는 독특한 성질이기 때문에, 주변 무리에 녹아들기 위해 자신의 강점을 감추려는 영재들이 있다. Linda Silverman은 저서에서 "다수의 사람이 영재성을 인정하지 않고 높은 지능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우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실체를 속여야 하며, 젊은 영재가 영재성의 오명에 대처하는 방법에는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 가장 흔하게 사용된다"라고 인용했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온전히 깨닫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은 대학교라는 사회로 돌아가기 전에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모두가 나와 같다고 여기다 문제를 겪기도 했고, 그런 차이를 염두에 두는 것이 더 좋은 관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전부 매우 작은 영역에서, 매우 적은 수의 사람 사이에서 느꼈을 뿐이다. 나는 청소년기 5년간 사회에서 격리되어 있었고, 따라서 대학교 생활을 시작하는 것은 사실상 인간 사회에 처음 나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나는 사람들에게 자발적으로 다가가지 않은 아싸였고, 대학교의 첫 학기의 초반은 한두 명을 제외하면 이야기를 거의 나누지 않고 지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주목을 받게 된 계기는, 프로그래밍 과제를 시간 내에 끝마친 사람이 나 혼자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속해있던 학과에서는 사회 기류에 맞추어 신입생에게 프로그래밍을 가르쳤고, 대다수 학생은 처음 접해보는 프로그래밍 언어를 어려워했다. 어느 날 수업에는 복잡한 실습 문제가 있었다. 그날 강의에서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가도 된다는 조교의 말에 강의실을 떠나려고 했던 사람이 나뿐이었다. 그 이후 내가 과에 프로그래밍 과제의 답안을 공급하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한 학기 내내 나를 끝없이 괴롭힌 질문은 "어떻게 그렇게 프로그래밍을 잘해?'였다.


  사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그 질문에 대한 나의 솔직한 답은, '왜 이걸 이해하지 못하는 거야?'이다. 어릴 때 프로그래밍을 하기는 했다. 초등학교 때, C언어보다 쉬운 언어로 초심자에게 추천하는 Visual Basic을 가지고 놀았다. 간단한 프로그램을 만들고 실행시켜보는 정도로, 인터넷에 있던 강좌를 보고 처음 몇 개를 따라 해 보았던 경험이 있다. C언어도 공부해보고 싶었지만 게으름을 피우다 Hello World만 몇 번 띄워보았다. 이런 경험 덕분에 프로그래밍 언어가 낯설지 않았을 수는 있겠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던 내용은 대학교에서 사용한 교재의 앞부분 2~3개 챕터뿐이었고, 프로그래밍은 거의 10년 만에 다시 하는 것이었다. 어쨌건, 나는 매번 옛날에 프로그래밍을 배웠다고 대답했다. 어릴 때 Hello World! 를 띄워본 것은 사실이니까. 




나를 열심히 감추다


  프로그래밍 강의에서 주목받은 이후, 매 시험 기간을 보내며 '내 능력'에 대한 질문이 점점 많아졌다. 프로그래밍 강의를 비롯해 다들 어려워하는 강의에서 계속 1등을 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학년이 바뀌며 여러 학년이 같이 수업을 듣고 서로 수강하는 강의가 달라지며 그런 관심은 줄었지만, 나는 최대한 공개적으로 답을 내놓지 않으려 하고 조별 과제에서는 주도하기보다 조용히 묻어갔다. 


  어떻게 그렇게 잘하느냐는 질문은 그나마 괜찮은 편이었다. 그저 열심히 했다고, 이전에 공부했다고 대답하면 적절하고, 또 다들 믿어주기 때문이다. 가장 난처한 질문은 어떻게 공부했느냐는 질문이다. 교양 영어를 강의하시는 교수님과 이야기를 하다 내 토익 점수를 얘기하게 되었는데, 그 말을 한 친구가 듣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금세 소문이 퍼져 내게 영어 공부를 하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하는 친구까지 생겼다. 나는 그런 질문에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어떤 특별한, 좋은 방법을 기대하고 물어보지만 사실 나는 별로 노력하지 않고 얻은 결과였기 때문이다. 도움을 주고 싶어도 줄 수 없었다.




  내 능력이, 영재성이 알려지면 내가 변명해야 하는 수많은 질문으로 이어졌다. 그런 질문에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질문들은 곧 나에 대한 많은 기대로 바뀌었고, 난 이미 나에 대한 요구에 질려있었다. 난 열심히 나를 감추고, 평범한 가면을 얼굴에 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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