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정의 내린 나의 자아
한 때 나는 나 자신을 설명할 때 '강아지 돌보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고 다녔었다. 그땐 마냥 좋은 의미만은 아니었다. 스스로 왜 사는지 질문했을 때 스스로 찾은 답이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벼랑 끝에 몰린 듯한 심정으로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느낄 때마다, 이 세상에 나밖에 없다는 듯 크고 맑은 눈으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봐주던 아이들이 내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그래서 나는 정말 일찍이부터 그들이 없는 세상을 두려워하고 걱정했다. 내가 사는 이유가 사라진 세상에서 내가 무엇을 갈피로 잡고 살아갈 수 있을지 조금도 감이 오지 않았다. 그때 마침 나는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터널 같은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최근 영화 인사이드 아웃 2를 보았다. 그 영화에서 묘사했던 것처럼 저 무의식 너머로 보내 잊기 위해 노력했던 수많은 기억들이 홍수처럼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오던 시기를 지나고 있었을 때였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살면서 몇 번이고 되뇌었던 말. 결국 그 어둡고 캄캄했던 시기도 결국 지나가더라. 내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도 결국 지나가더라. 날 힘들게 했던 것들로부터도 벗어나고, 날 버티게 했던 것들로부터도 아득히 멀어져야만 했던 시기가 찾아왔다. 말 그대로 공허하게 텅 빈 우주에 나 홀로 떨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심코 일상생활을 하다가도,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걷다가도, 갑자기 길을 잃어버린 미아처럼 우두커니 멈춰 서곤 했다. 이 세상에서 내 존재가 정말 아주 작게 느껴졌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아이들과 건강하게 이별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어떻게든 그 시기를 벗어나기 위해 해 왔던 대로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여전히 물 밑에 가라앉아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계속 발버둥을 치고 물장구를 치다 보면 곧 떠오르리라 생각했다.
그러다 새로운 가족을 만났다. 알고리즘이 맺어준 운명. 정말 인기 없는 점박이. 얼룩무늬 강아지. 심지어 얼마나 클지도 모르는 시골 잡종 강아지. 안락사 임박이라는 유기견 공고로 올라온 그 아이는 먼저 떠난 우리 큰 강아지, 바둑이와 많이 닮아있었다. 그 아이도 못생겨서 아무도 데려가지 않았던 문열이였다. 바둑이를 생각하며, 이 아이에게는 어쩌면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엄마에게 넌지시 물어봤다. '너 아니어도 책임져줄 사람은 많아.' '괜히 네가 데리고 왔다가 더 좋은 인연을 만날 수도 있는데 네가 그 기회를 빼앗는 거면 어쩌려고?' 엄마의 말도 납득이 갔다. 이 아이를 보고 연민을 느끼는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리라. 제발 그러길 바라며 그렇게 애써 넘겨버리고 잊기 위해 노력했다. 한 달 정도가 지난 후 다시 알고리즘이 그 아이와 나를 연결해 주었다. 이미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아이를 데려가겠다거나 사소한 문의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손가락이 이끄는 대로 보호소로 연락을 했다. 나는 그 아이에 대한 첫 문의였다. 그렇게 그 아이에게 군밤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새로운 가족으로 맞이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보호소에 있던 수많은 강아지들이 안락사를 당했다. 다시금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새 가족과 어떻게 친해지면 좋을까 걱정도 잠시. 내 몸에는 나도 인지하고 있지 못했던 약 20년이란 시간의 경험과 습관이 나를 자연스레 이끌었다. 분명 우리 큰 아이 바둑이, 작은 아이 달래와 전혀 달랐지만 나는 그 아이의 표정과 작은 몸짓만으로도 그 아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이가 무서워하고 어려워하는 것을 기다려주고 있었다. 태어나 처음 하는 샤워와 처음 깎는 발톱에 놀라지 않도록 다독였다. 순간 먼저 간 우리 큰 강아지, 바둑이가 배변실수하던 때가 겹쳐 보였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마냥 혼내는 것 밖에 할 줄 몰랐다. 처음 깎아본 발톱에 작은 강아지, 달래의 발에서 피가 나게 했던 적도 있었다. 어리숙했던 처음과 현재의 능숙한 모습이 겹쳐 보이며 만감이 교차했다.
우리 가족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강아지한테 절대 정 못준다고 하더니. 다들 누구보다도 능숙하게 아이가 편안하게 적응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건 분명 의식적인 것이 아니었다. 몸에 밴 20년의 습관이었다. 사실 아이들이 떠난 뒤에도 집의 구조는 아직도 강아지에게 편리한 구조로 남아있었다. 아이들이 자주 다니던 경로엔 여전히 미끄럼 방지 패드가 깔려있고, 아이들이 화장실로 쓰던 베란다 공간은 그대로 텅 비어있었다. 밥그릇이 놓여있던 공간도. 아이들이 잠을 자던 공간도. 누군가 이렇게 금방 채울 거라곤 생각 못했는데, 이럴 줄 알았다는 듯 그대로 다 비어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묘한 기분을 느꼈다.
혹시나 너무 벌써 빠르게 새로운 가족을 맞이해서, 아이들이 서운해하면 어떡하나 그게 가장 큰 걱정이었다. 군밤이에게 '세상에서 제일 예쁜 강아지'라고 애정표현을 하다가도 아이들이 떠올라서 '세상에서 세 번째로 가장 예쁜 강아지'라고 말을 고치기도 했다. 떠난 아이들의 생각을 오히려 새로운 가족을 맞이하면서 훨씬 더 자연스럽게 많이 하게 되었다. 아이들의 이름을 말할 기회가 좀처럼 없었는데, 자연스럽게 입 밖으로 아이들의 이름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실수로 이름을 헷갈려 부르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나는 내가 무의식적으로 '우리 애들은 안 그랬는데~' '우리 애들은 이랬었는데~'라고 말할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새로운 가족이 생겼지만 여전히 내겐 너희가 '우리 애들'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면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결코 아이들을 잊지 않았다. 그 아이들을 새로운 가족으로 대체한 것이 아니다. 여전히 아직도 아이들은 내게 큰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불쑥불쑥 피어오르는 죄책감의 감정이 '우리 애들'이라는 말로 다독여지는 것을 느꼈다.
얼마 전 오랜만에 꿈에 작은 강아지가 찾아왔다. 이미 떠난 뒤의 모습이었다. 내 품에 가만히 안겨 있는 아이의 털을 쓰다듬고 냄새를 맡으며 뼈만 느껴지는 아이의 작은 몸을 조심스럽게 껴안았다. 그때 갑자기 코에서 킁 소리가 나더니 그 작은 콧구멍에서 시원한 바람이 색색 뿜어져 나왔다. "엄마! 달래가 다시 살아났어!!" 내 기쁨에 찬 목소리에 멀리에서 여동생과 엄마가 한걸음에 달려왔다. 우리 가족은 모두 그 작고 까만 코에 귀를 가져다 대며 작은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이가 눈을 떴다. 멀어버린 하얀 두 눈엔 내가 한가득 담겼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그 눈을 한참을 바라봤다. 그 사이에 동생과 엄마가 삶은 닭가슴살을 가져왔다. 죽기 한 달 전부터 아무리 코에 갖다 대고 입에 넣어도 먹지 않았던, 달래가 가장 좋아했던 음식이었다. 달래는 잠깐 코를 킁킁하더니 입을 벌려 닭가슴살을 조심스레 받아먹었다. 입에서는 챱챱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몇 개의 닭가슴살을 더 받아먹고는 달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내 품에서 다시 눈을 감았다. 그렇게 나는 눈을 떴다. 달래가 왔다 갔구나 하고 벅찬 기분을 느꼈다. 이전에 이렇게 달래가 꿈에 찾아왔을 때는 다시 떠난 달래를 껴안고 한참을 울었다. 잠에서 깬 뒤에도 한참을 그대로 누워서 엉엉 울었다.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첫 꿈과 다르게 나는 그 사이에 조금 강해져 있었다. 아이가 찾아와 줬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뻐할 수 있게 된 내 마음에 놀랐다.
새로 찾아온 복덩이 덕분에 오히려 더 아무렇지 않게 평범함 일상 속에서 아이들의 이름을 말하고, 너희들을 겹쳐보고, 잊었던 너희와의 에피소드를 떠올릴 수 있어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너희가 내 안에 가장 중요한 곳, 가장 깊은 중심에 자리 잡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어 감사했다. 이런대로 여전히 나는 강아지 돌보는 사람으로서 살고 있다. 불과 몇 년 전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던 때와는 분명 다른 마음가짐이다. 아이들이 내 마음속에 심어준 따듯한 사랑의 씨앗들이 싹이 돋고 나무가 되고 가지를 뻗쳐 더 많은 사랑을 베풀고 나눌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했음에 감사하게 되었다. 강아지 돌보는 사람으로 살며 받을 앞으로의 더 많고 큰 사랑들이 기대가 된다. 사랑하는 바둑이, 달래, 그리고 군밤이. 그 외에도 나를 채워주었던 작은 갈색 푸들, 곰탱이, 비담이, 담비, 흰둥이, 깜둥이 수많은 강아지들에게 감사한다. 너희들을 돌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들을 내게 주어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