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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도도 Nov 03. 2023

하늘색, 흰 구름 가득한 벽지의 방

그때의 누구도 내게 없지만

눈이 번뜩 떠졌다. 꿈이다.


눈앞에 하늘색, 흰 구름무늬가 가득한 천장이 들어온다. 눈이 떠졌지만 잠시 눈을 꿈뻑이며 숨을 고른다.


찬찬히 생각해 보니 너무나 얼토당토않게 꿈같은 이야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꿈을 꾸는 동안 나는 꿈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의심하지 않고 현실이라 믿었다.


고개를 돌려 방안을 휙 살핀다. 그때와 방의 구조는 조금도 다르지 않다. 마침 햇살이 창 너머로 들어와 블라인드 사이로 날 비춘다.


그때도 그랬었다. 구름 가득한 하늘색 벽지, 어릴 적 당연히 동생과 영원히 같이 잘 거라 생각해 잘못 산 슈퍼퀸 사이즈 침대, 9살 때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내 첫 강아지 인형 몽몽이, 동생이 어릴 적 선물로 받은 상체만 한 곰돌이 인형 두 개가 나란히 침대의 오른쪽 빈 구석을 채운다.


아마 어젯밤에 아주 잠시 그때를 추억했던 것 같다.













우리 집에 와서 큰 강아지, 작은 강아지와 어색하게 첫인사를 나누는 너를 쳐다보며 나는 점심을 준비한다. 다행히도 엄마가 전날 시장에서 사둔 우거지 된장국이 냄비에 한가득이다. 우거지 된장국 괜찮냐는 질문에 너는 무엇이든 다 좋다며 화답한다. 국에 건더기를 한가득 담아 너에게 건네고 내 그릇도 챙긴다.


식탁에 마주 앉아 우린 식사를 하고 대화를 나눈다. 발아래엔 음식 냄새에 호기심이 생긴 큰 강아지와 작은 강아지가 쪼로로 다가와 우리를 올려다본다. 안된다! 단호하게 말하는 나를 보며 네가 웃는다.


그런 우리를 보며 아이들도 웃었겠지 아마.


식사가 끝나고 조금은 나른해진 우리는 방을 꽉 채우는 커다란 침대에 나란히 누워 하늘색, 흰 구름이 가득한 벽지를 올려다본다.


당연한 듯 작은 강아지는 따듯한 꼬순내를 풍기며 우리 사이에 눕는다. 창문을 살짝 열어두어 창밖에서 봄인지, 가을인지, 따듯한 듯 시원한 바람이 솔솔 들어와 우리 몸을 아주 살짝씩 스쳐 지나간다.


옆을 돌려보니 졸린 듯 넌 눈을 감은채 색색이며 숨을 고른다. 이때의 큰 강아지는 아직 점프를 잘할 때라 셋만 오붓이 누워있는 우리를 질투해 침대 위로 폴짝 뛰어 올라온다.


내가 좋나 봐! 본인의 다리 바로 곁에 똬리를 틀고 눕는 큰 강아지를 보며 네가 기쁜 듯 말한다.


당연하지, 좋은 사람을 알아본다고, 넌 내 사람이잖아. 이 말을 뒤로 우린 잠에 빠진다.








얼마나 잠들었을까 먼저 눈이 떠진 나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핀다. 내 겨드랑이에 얼굴을 파묻은 채 고롱고롱 숨소리를 내며 잠에 든 작은 강아지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옆에 네가 고개를 내쪽으로 향한 채 곤히 자고 있다.


그 얼굴들을 나는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너의 얼굴 잠깐,

작은 강아지 얼굴 잠깐,

너의 숨소리 잠깐,

작은 강아지 숨소리 잠깐,

온 세상이 잠시 멈춘 듯한

그 시간을 천천히 즐긴다.


이쯤이면 이미 불편하다고 본인의 자리로 사라졌을 큰 강아지를 생각하며 살며시 고개를 들어 발아래를 본다.


그런데 의외로 큰 강아지가 여전히 너의 다리 근처에서 똬리를 튼 채 등을 아주 살짝 오르락내리락하며 평온히 잠에 든 모습이다.


시간이 좀 지났는지 창 밖으로 이젠 약간 노란빛이 된 햇살이 너희들의 위로 쏟아져 내린다.


하늘과 맞은편 아파트만 보이는 뷰인데도 눈앞에 수많은 나뭇잎이 살랑이는 듯하다.


그때 나는 태어나서 제일 행복한 기분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 순간이 내 인생에 찾아올 몇 안 되는 아름다운 찰나라는 것을.


자고 있는 너희를 하나씩 번갈아 바라보며 이 순간을 절대 잊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눈에 담고 또 담는다.


눈을 감고 머리로도 새긴다.


그리고 그 기억은 여전히 하늘색, 흰 구름이 떠 있는 벽지가 있는 방에 들어갈 때마다 열심히 새기고 새긴 노력이 무색하지 않게, 따뜻하고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칠 때마다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재생된다.
















어젯밤에도 아주 잠깐 그렇게 그때를 생각했다.

나는 여전히 그 공간이다.


하늘색, 흰 구름이 가득한 벽지 아래에서 햇살을 맞으며, 콧등을 솔솔 스쳐 지나가는 바람을 느끼며, 겨드랑이에서 색색이던 곱슬 털을 지닌 약간 후끈한 온기의 작은 강아지를 생각한다.


그 발아래 어느새 인기척도 없이 점프해 올라와 혹시나 닿진 않을까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자던 큰 강아지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공간에 아무렇지 않게 태평한 얼굴로 누워 잠에 빠졌던 너의 얼굴도 잠깐 생각한다.


그때의 작은 강아지도, 큰 강아지도, 너도 더 이상 내게 없다. 그럼에도 하늘색, 흰 구름 가득한 벽지의 방은 내게 남아있다.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 그대로, 온전한 사랑을 받았던 순간의 증거로 남아있다.


이 증거는 여전히 무너질 것 같은 하루의 끝마다 또 꿋꿋이 살아가야 할 이유로 또 내 눈을 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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