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퇴근하다가 굉장한 걸 봤다. 지하철 5호선을 타고 화곡역에서 내렸는데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한 남자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어폰을 낀 채 음악을 듣고 있었는데도 여자가 남자를 야단치는 듯한 소리가 한 번씩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저 남자가 뭔가 크게 잘못한 모양이네. 여자가 누나인가? 그러기엔 여자 쪽이 더 어려 보이는데? 아니, 남편인가? 아닌가?’ 같은 생각을 하며 난간을 잡고 계단을 올랐다.
그런데 뒤쪽이 소란스럽더니 “따라와! 따라오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여자가 남자의 팔을 잡고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남자는 검정 후드티에 검정 바지, 검정 백팩에 헤드셋, 마스크까지 온통 검정 일색이었는데 자기 체격의 반쯤 되는 여자에게 붙들린 채 마지못해 걸음을 옮겼다. 이어폰을 뺐더니 남자가 휴대폰 어쩌고 하고 있었고 여자가 “무슨? 누가 휴대폰을 그렇게 봐?”하며 자기 엉덩이 위쪽에 손을 갖다 대며 선언하듯 말했다.
“손이었어!”
남자가 성추행을 한 거였다. 여자는 한 손으로 “찍어. 찍으라구.” 했고 남자는 개찰구에 카드를 갖다 댔다. 나는 남자가 달아날까봐 갑자기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여자는 이제 남자의 후드를 잡고 있었다. 반대쪽 개찰구 쪽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며 힐끔거렸고 나는 걸음을 멈추고 두 사람이 역무실로 사라질 때까지 지켜봤다.
7월엔가 나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북토크에 갔다가 집에 가는 길이었다. 목발 보행 중이어서 지하철역에서 환승하면서 엘리베이터에 탔다. 걸리적거리지 않게 구석에 가서 섰는데, 60대로 보이는 남자가 옆에 서면서 등 뒤 손잡이를 짚었다. 옆구리에 남자의 손이 닿아서 내가 옆으로 옮겼는데 다시 손이 닿는 게 느껴졌다. 내가 올려다보니 남자가 “뭐요, 아줌마?” 했다.
“손이 닿아서요.”
내가 대꾸하자 남자가 “뭐요?”하며 대뜸 언성을 높였다. “손이 닿아서 봤다구요.” 내가 다시 말했고 남자는 “무슨 손이 닿아?” 하며 소리를 질렀다. 나도 지지 않고 “조심하시라구요!” 외치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는데 남자가 어디서 거짓말이냐느니 상습적이라느니 하며 계속 따라붙었다. 내 일행이 그만하시라며 남자를 막아서다가 침 세례를 당했다. 겁나지 않은 척했지만 다리가 후들거렸다. 경찰에 신고할까도 잠시 생각했지만 밤 10시가 다 된 시간이었고 시끄러운 일에 휘말리는 것 자체가 불미스럽게 느껴졌다. 그때, 우리와 같은 엘리베이터에 탔던 남자가 끼어들었다.
“아저씨, 제가 아까부터 다 봤는데요. 이건 아니잖아요.”
한 청년이 말하자 또 다른 중년 남자가 합류해서 문제의 남자에게 뭐라 뭐라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사이 남자에게서 벗어났고 지하철 안전 도우미의 도움으로 지하철에 탑승했다. 피로가 몰려왔다. 그냥 피하고 말 걸 내가 쓸데없이 일을 키운 건 아닌가 생각했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니면서. 물론 그저 손을 내려놨는데 우연히 내 몸에 닿았을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피해를 끼친 건 맞으니 사과하면 될 일이다. 그럴 의도는 없었다고, 불편하게 했다면 미안하다고.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했지만 그건 내 생각이었을 뿐이다.
도움을 바라지 않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여자를 보며 대단하다는 생각과 안쓰러운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왜 아무도 돕는 사람이 없지, 하는 생각도. 하긴, 누가 나서기에는 여자가 너무 씩씩하게 잘하고 있었다. 부당한 일에 여자처럼 목소리를 내는 게 나는 아직도 참 힘들다. 용기를 내보려다가도 사람들의 시선이 의식되고 금세 의지가 꺾인다. 아니, 이게 용기까지 필요할 일인가?
두 사람은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겠지? 남자의 주장대로 성추행이 아니라고 해도 CCTV가 지켜봤을 테니 밝혀질 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