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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 러스씨 Mar 06. 2021

[3] 애매한 건 재능이 아니라 야심

⏤ '애매한 재능의 저주' 운운하는 사람이 보지 않으려는 것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무언가 해야 한다고 느낀다면 그냥 하면 된다. 간단하다. 간단한 걸 복잡하게 만들 이유가 없는 것. 해야만 하는 근거를 따지고 행동에 이유가 마련돼 있어야만 한다는 논리를 세우는 자체가 '그걸 하기 싫은 자신'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작은 기만은 아닐까? 해야만 하는 이유에 집착하는 사람은 어느 수준에 이르면 그렇게 하면 안 되는 촘촘한 알리바이를 세우고 있는 자신만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언젠가 김영하 소설가가 말했듯, 하면 안 되는 백가지 이유보다 때론 해야만 하는 이유 한 가지 이유만으로 우리는 그 무언가를 할 수 있다. 오래전부터 자기 '근거'를 먼저 마련하고 행동에 이유를 덧대라고 충고하는 말들이 많은데, 그닥 신경 쓸 만한 말들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근거를 먼저 마련하라는 말이

체념의 근거가 될 때


바둑에서도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 말이 있다고 한다. 풀어보면, '내 살 근거를 먼저 마련한 다음에라야 비로소 상대를 타격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실제 바둑 상황에서는 '내 살 근거'가 마련됐다는 확신이 드는 상황 자체가 드물다. '내 살 근거'의 합의된 기준 자체가 없다. 다만 그 기준이라는 것도 자의적이며, '기준'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개인의 고유한 기풍이 정해진다는 의미 정도로만 받아들이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바둑과 인생을 연결해서 말하길 좋아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일도 네 삶의 근거를 마련하고 나서 하라'는 교훈을 말하려고 앞선 글자를 인용하곤 한다. 할 수는 있는 말이다. 일리가 아주 없는 말도 아니니. 하지만 바둑의 "아생연후살타", 그리고 맹자의 무항산무항심(無恒産無恒心)과 같은 말은, 우리가 살아가는 구체적인 현실에서 어떤 일을 하는 근거로 사용되기보다는 무언가를 하지 않거나 체념하는 논리로 더 많이 사용된다.

윤태호 만화가의 『미생』 중. 아생연후살타를 인용하는 이들이 간과하는 사실 중 하나는 그것이 안정지향의 '정수'라는 것이다. 유리함을 굳힐 순 있으나 불리함을 역전하지는 못한다.

   ‘무항산무항심'이라는 맹자의 말씀 자체도 엄밀히 말해서 앞뒤 맥락을 전부 살피지 않고 현대 사람들이 자기 필요한 부분만 뜯어서 논리에 보태는 식으로 오용하고 있다는 인상이 든다. 유가 사상 자체가 사농공상의 계급구조가 명확하던 시대에서 백성을 통치하고 교화하기 위해서 전파하던 권력층의 통치교과서였다는 것을 먼저 짚지 않을 수 없다(그게 무조건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사람들이 "무항산무항심"이라는 말을 건져 올린 문장의 출처는 "若民則無恒産 因無恒心(약민즉무항산 인무항심)"인데 이 자체의 의미는 흔히 알고 있듯이, '일반백성에 이르러서는 경제적 안정이 없으면 항상 바른 마음을 가질 수 없다'이다. 하지만 이 문장은 앞에 한 문장이 더 있고, 반드시 전체 맥락 속에서 대구(對句)로 읽어야만 그 의미를 오해하지 않고 바로 볼 수 있다. 공맹과 노장에 나오는 문장들은 유기적으로 촘촘히 짜여 있어서 어느 하나만 뜯어내서 해석할 수 없다. 전체 문장은 "無恒産而有恒心者 唯士爲能, 若民則無恒産 因無恒心(무항산이유항심자 유사위능, 약민즉무항산 인무항심)"이다. 전체 의미를 한 번에 읽으면 '일정한 생업이 없는데도 항상 바른 마음을 지닐 수 있는 사람은 선비 뿐이고, 일반 백성은 경제적 안정이 없으면 일정한 마음을 가질 수 없다'가 된다. 우리가 흔히 쓰는 '무항산무항심'과는 의미의 맥락 자체가 다르다. 앞뒤 문장은 정확히 대구 형식으로 구성돼 있고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무항산무항심'이 아니라 '선비'와 '일반 백성'이 다르다는 것이다. 과하게 얘기해서 '무항산무항심'을 강조하고 그 의미를 새기는 사람은 스스로 통치받는 봉건시대 신민(臣民)임을 자인하는 것이다. 오늘의 우리는 구체적인 한 개인으로 있지, 일반 백성으로 있는 게 아니다. 그러니 어쭙잖게 바둑용어를 언급하거나 유가 말씀 인용하면서 노비 자처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재능'이라는 게으름, 혹은 사회적 핑계



피라미드는 엄청나게 크다. 사람들은 피라미드의 핵을 최상단의 한 조각으로 보지만, 실제로 피라미드 중에서는 끝이 잘려 있는 개체도 심심찮게 보인다. 그래도 여전히 피라미드다.

그러니 주어진 상황에서 자기 할 수 있는 만큼 하면 된다. 그게 최선이며, 우리는 최선 이상으로 무언가를 할 수 없고, 바랄 수도 없다. 예전에 무슨 유튜브 영상을 봤는데 당사자는 예술을 하다가 관둔 사람 같았다. 그러면서 예술분야에서 어설픈 재능만큼 한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게 없다는 논리를 펴고 있었다. 고작 몇 년 해보고 저러나 싶었다. 어느 분야든 발목 담근 정도로 '애매한 재능이야말로 악마의 재능이며 인생을 불행하게 하는 거'라는 인생 통찰을 전파하는 사람을 보고 있으면 공허한 자위 행위를 보는 것 같다. 재능은 아무나 언급할 정도로 가벼운 게 아니다. 개인적으로 재능은 피라미드 규모의 거대한 구조물의 마지막 한 조각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피라미드를 보면 터무니없이 크다. 비유컨대 무지막지하게 거대한 피라미드를 거진 다 완성하고 마지막에 올라가는 그 사각뿔 한 조각이 없어서 좌절한 사람이 언급할 자격이 있는 게 재능이다. 1층에 벽돌 몇 장 깔아봤던 정도로 ‘재능’ 운운하는 사람을 보면, 어차피 당신은 재능이 아니라도 어떻게든 관둘 이유를 찾았을 테니 차라리 지금 관두길 잘했다고 말해줄 것 같다. 

  너무 잘하려고 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건 '무항산'도 아니고 '아생'도 아니다. '재능'은 더더욱 아니다. 그게 정말 좋으면 남이 뭐라든 일단 하면 되고 할 수 있는 만큼 하면 된다. 어디 선언할 일조차 아니다. 여담으로 앞에서 말한 유튜브 영상 아래에는 '예술분야에서 애매한 재능은 인생을 구렁텅이로 빠뜨린다'는 내용에 격하게 동의하는 사람들의 댓글로 넘쳐났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빛나는 댓글이 하나 있었다. 대충 윤문 하자면 다음과 같다. "그게 진짜 좋으면 걍 하기나 해요. 돈 못 버는 것도 별 문제가 아니에요. 다른 일 하면서 부업이라고 생각하면서 하면 되죠. 그걸 하는 게 너무 좋고, 안 하면 죽을 것 같고, 꼭 해야겠으면 애매한 야심 갖지 말고 계속하면 돼요. 애매한 건 재능이 아니라 그쪽 야심이었겠죠." 살을 좀 덧붙이자면 그 분야에서 그럴싸하게 성공하는 것과 그 분야를 사랑하면서 계속 몸 담고 있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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