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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희 Jan 08. 2021

처음

두려움과 설렘



어제 아침 눈 내리는 걸 봤다. 나는 원래 아침잠이 많은 편이라 아침 시간에 눈 뜨는 일이 드물지만, 어제는 왜인지 아침 일찍 깼다. 침대에 누워 멍하게 눈만 깜빡이고 있었는데 주방에서 아빠의 말소리가 들렸다. “눈 오네, 쌓인다는데?” 아마 엄마에게 말하는 소리였을 것이다. 이야기를 들은 엄마는 별 반응이 없었지만, 나는 눈이 온다는 소리에 이불을 걷고 얼른 마당으로 나갔다. 부산 사람을 설레게 하는 말 중에 ‘눈 온다’라는 말 만한 것이 없다. 적어도 내게 ‘눈’은 많던 아침잠도 달아나게 할 만큼 설렌다.


현관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가니 하늘에서 솜털 같은 눈이 폴폴 내리고 있었다. 불과 며칠 전 내린 싸락눈이 올해 첫눈이자 마지막일 거라고 짐작했는데 내 예감은 행복하게도 빗겨나갔다. 그렇게 마당에 서서 내게는 드문 아침 햇살과 눈을 맞고 서 있는데 밖에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산에 눈 이렇게 많이 온 거 처음 본다!”


정말 순수하게 기쁜 목소리. 그런 목소리를 오랜만에 들었다. 바닥에 옅게 쌓인 눈이었지만 분명 그 아이 삶에서는 그 정도의 눈이 함박눈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바닥에 쌓인 눈을 본 그 말간 기쁨이 얼마나 예쁘게 느껴지던지. 내가 어렸을 때도 눈이 쌓일 정도로 많이 온 적이 있었다. 그렇게 많이 쌓인 날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남아 있는 기억은 고작 밖에 나가서 쌓인 눈을 봤다는 것밖엔 없지만(눈사람도 분명 만들었을 것이다.) 아마 어제 그 아이처럼 나도 쌓여있는 눈 위로 걷는 걸음걸음마다 행복했을 테다.




그래, 내게도 설레는 처음이라는 게 있었다. 어린 날에 처음 본 쌓인 눈, 처음 가졌던 낡은 MP3, 처음 혼자 간 여행 같은 것. 요즘 나는 ‘처음’이라는 말이 심장을 꽉 조이게 하고 두려운 것이라고만 느꼈는데 처음이라는 단어는 마냥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걸 어제 그 아이의 목소리로 다시 느꼈다.


나는 언제부터 처음이라는 말의 설렘을 잊었을까. 추측하기로는 점점 처음 하는 것, 처음 보는 것, 처음 만나는 것이 줄어들면서 설렘과 멀어진 게 아닌가 한다. 처음이 줄어든 일상에서 나는 익숙함을 지루하지만 내게 안전함을 주는 것으로 느꼈고 영영 그 상태에 머물러 있고자 했다. 그리고 처음의 모든 것을 내 안전을 공격하는 무엇쯤으로 여기며 두려워했다. 그리고 그 처음의 두려움은 요즘 나를 숨 막히게 할 만큼 가장 큰 스트레스였다. 지금처럼 처음이 두려웠을 때가 없었다.


하지만 어제와 오늘은 조금은 마음이 편했다. 어제 아침의 그 어린 목소리 덕에 처음이 괴로운 것만은 아니었다는 걸 다시 기억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겪을 처음에 두려운 것들만 있지는 않을 것이란 것. 어제 내린 눈 마냥 솜털 같은 설렘이 같이 할 것이라는 그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 조금 더 걸음을 옮길 용기가 생겼다. 한 발을 디딜 용기가 생겼으니 다른 한 발은 조금 더 쉽지 않을까. 오늘은 두려움보다는 그런 설레는 기대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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