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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형원 Feb 26. 2022

캘리포니아 드리밍

2030 성장 에세이


  “I’d be safe and warm I was in LA. California dreaming…”

(LA에 있다면 안전하고 따뜻할 텐데. 캘리포니아를 꿈꾸며...)


  홍콩영화 중경삼림의 OST로 유명한 <캘리포니아 드리밍>의 가사이다. 목도리를 동여매고 털부츠를 신는 계절이 오면, 꿈꾸는 장소가 있다. 캘리포니아. 사계절 따사로운 햇빛이 대지를 덥혀주는 그 곳. 지금 캘리포니아에 있다면 따뜻할 텐데... 그곳은 내 팔다리뿐 만 아니라, 가슴 한 구석도 뜨겁게 데워준 곳이다.



  캘리포니아에는 딱 두 번 가봤다. 가족상봉이 핑계였다. 누나가 LA에 거주하고 있는데, 먹고 사느라 바빠 한국에 잘 들어오지 못한다. 학생 시절 부모님을 모시고, 가족여행 겸 그녀를 만날 겸 LA행 비행기를 탔었다. 5년전 추석연휴 때였다. 당시 나는 중국에 교환학생으로 있었다. 그래서 미국여행을 위해 나는 상하이에서 비행기를 탔고, 부모님은 인천에서 LA로 가는 일정이었다. 그리고 나는 부모님 비행기 편보다 이틀 늦게 중국으로 돌아가도록 스케쥴을 잡았다. 가족여행을 마친 후, 짧게나마 자유롭게 캘리포니아를 누비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침 중국은 긴 국경절 연휴에 접어들어 타이밍 또한 적절했다.


  가족이 모여 미국 곳곳을 여행했다. 캘리포니아, 네바다, 유타, 애리조나 주 등 서부를 돌아다녔다. 즐겁고 가슴 짠한 가족여행이 끝나자 부모님은 한국으로 가셨다. 젊은 누나와 내가 둘이서 미국의 자본주의를 즐길 차례였다. 사실 난 누나와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조금 서먹서먹하다 할 수도 있었다. 오랜 기간 떨어져 살았기 때문일까. 내 20대 초반 그녀는 유럽에 있었고, 그녀가 한국에 있을 때 난 군대에 있었다. 제대하니 그녀는 미국으로 갔다. 사실상 성인이 된 후 계속 떨어져 살아왔던 것이다. 그래서 난 그녀의 연애사나 인생사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했다. 그저 캘리포니아에서 살고 있는 자유로운 영혼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내게 느끼는 감정도 나의 것과 비슷했을 것이다. 그러나 피는 물보다 진하다 했던가. 서로 말은 안 했지만 애틋함은 가지고 있었다. 미국생활 6년차였던 그녀는, 나를 데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동생이 영화를 좋아한다고, 헐리우드 세트장에 데려갔다. 바다를 좋아한다고, 산타모니카 해변에도 데려갔다. 미국의 진정한 맛을 보고싶다고 해서, 기름과 고기와 치즈로 뒤범벅 된 햄버거 가게에 데려갔다. 그녀의 남자친구도 함께 분위기 있는 바에서 술도 좀 마셨다. 그렇게 남매간의 정을 쌓아갔다. 산타모니카 해변가를 걸을 때였던가, 저 멀리 떠 있는 하얀 요트를 바라보며 그녀가 말을 꺼냈다. “내가 늘 해외로 나가려 했던 이유가 뭔 줄 아냐?” 내가 답했다. “역마살이지 뭐. 나도 좀 있어. 우리 가족 유전자인 거 같아. 그런데 그녀의 말은 뜻밖이었다. “엄마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어.”


  나는 침묵했다. 그녀가 이어서 말했다. “어릴 때부터, 엄마는 힘들 때면 날 붙잡고 하소연했어. 그리고 아빠한테 전화하라고, 네가 한 번 얘기해보라고... 어린애가 뭘 알겠냐. 나는 그게 트라우마가 됐어. 그래서 늘 밖으로 나가고 싶었어.” 더듬어보면, 누나는 종종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이었다. 엄마는 시댁 사람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엄마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고, 늘 괴롭혔었다. 그런 엄마는 아버지에게 힘든 부분들을 이야기했지만, 효자로 유명했던 아버지는 시댁 편만 들었고, 늘 큰 부부싸움으로 이어졌다. 그럴 때면 엄마는 그녀를 찾았다. 그녀가 유일한 탈출구였던 것이다. 엄마는 그녀에게 자신의 감정을 구겨 넣었다. 하지만 10대 소녀가 어른들의 복잡한 관계와 애증의 감정을 감당하기엔 벅찼을 것이다. 이는 서서히 그녀의 트라우마로 자리 잡혔다.


  문득 내 머릿속에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 중학교 때였나, 그녀가 사춘기일 때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었다. 그녀는 남자처럼 행동이 걸걸했지만 평소에 비속어는 잘 안 쓰는 학생이었다. 그런데 집에서 꼭 나가고 말겠다며 욕설을 했었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장면들도 스쳐갔다. 명절날 시댁에서 홀로 어깨를 들썩이던 엄마의 뒷모습.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고, 매일 술 마시고 한밤중에 들어오는 아버지. 우울증 약을 먹고 있던 엄마. 딸에게 울며불며 하소연하는 엄마. 그리고 가족보다 친구를 더 좋아하며 밖으로만 나돌던 10대인 나.


  담배를 태우고 싶어졌다. 한 개피를 꺼내어 불을 붙이고 깊숙이 들이쉬었다. 평소에는 맛있게 피던 담배인데, 그날따라 눈이 맵고 가슴이 아렸다. 아마 독한 담배라 그랬을 것이다. 그녀에게 딱히 어떤 말을 하지 못했다. 그냥 그렇게 내리쬐는 캘리포니아의 햇볕을 받으며 해변을 같이 걸었을 뿐이다. 그리고 중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LA시내가 레고처럼 작게 보이려 할 때, 눈이 다시 시큰거렸다. 담배를 피우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이야기가 비약되었을 수도 있지만, 가족구성원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고 싶진 않았다. 아픔 없는 가족사가 어디 있으랴. 다만 그 상처에 관심 기울이지 않았던 나 자신에게 회초리를 들고 싶었다. 그리고 그 생채기를 오롯이 품고 살았던 10대 소녀를 꼭 안아주고 싶었다. 동시에 그 소녀가 성인이 되어, 머나먼 미국땅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모습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그녀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딛고, 연고 하나 없는 캘리포니아에 둥지를 틀었다. 악착같이 대학원 공부를 하며 꿈을 키워 나갔고, 영주권을 받기 위해 과로로 응급실에 실려가면서까지 일했다. 동양계 여성으로서 받는 온갖 차별도 꿋꿋이 이겨냈다. 지금 그녀는 헐리우드의 시각디자이너로 멋지게 살아가고 있다.


  캘리포니아의 눈부신 햇살이 지금도 내 마음속에 쏟아진다. 그 따스한 태양의 온기가 그녀의 새 둥지에도 속속 스며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녀의 캘리포니아 드리밍을 응원한다. 그리고 내가 그녀를 이해했던 것처럼, 엄마와 아버지의 인생도 헤아려보고자 한다. 이제는 가족의 아픔을 보듬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그들에게 줬던 상처에도 용서를 빌고 싶다. 가족이기 때문에 서로 생채기를 내지만, 또 가족이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껴안을 수 있는 거니까.


이중섭 - 가족과 비둘기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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