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만으로 장면이 그려지는 것, 이것이 음악만의 가장 큰 특징이 아닐까 생각한다. 3월 25일 서울시향의 '일뤼미나시옹'이 그러했다.
1999년 12월, 고음악의 거장 지휘자 필리프 헤레베허에게 발탁되어 유럽 무대에 데뷔한 소프라노 임선혜는 일찍이 클래식과 뮤지컬계에서 명성을 떨치며 관객들을 만나왔다. 특히 임선혜는 독일 일간지 프랑프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에서 '탁월한 언어적 지성으로 노래의 정서를 풀어낸다'는 평을 받은 바가 있는데, 이번 무대에서 벤저민 브리튼의 <고음역 성악과 현을 위한 '일뤼미나시옹'>을 선보인 것은 그녀의 강점이 돋보일 수 밖에 없는 무대였다 판단한다. 그녀의 곡 해석 능력과 무대를 자신의 장으로 만드는 힘은 마치 오페라의 한장면을 보듯 신기루의 한장면이 떠올랐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무대는 성공적이었다.
이 날 지휘를 맡았던 최수열 또한 빼놓을 수 없다. 현재 부산시향의 예술감독이자 코리안챔버오케스트라 수석객원지휘자로 활동 중인 최수열은 이미 전문 지휘자로서의 입지를 다진지 오래이다. '최수열'이 지휘하는 공연을 일부러 찾아오는 관객이 있을만큼 그의 탁월한 음악성과 악단을 이끄는 리더십은 연주의 완성도로 보여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날 그는 에드워드 엘가 <현을 위한 세레나데>, 차이콥스키 <현을 위한 세레나데>에서 단원들과 호흡을 함께 하며 연주의 감동을 관객들에게 선사했다. '최수열만의 음악'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합이 빛을 발한건 단연 벤자민 브리튼 <고음역 성악과 현을 위한 '일뤼미나시옹'> 이었다. 이 곡은 현악 오케스트라와 목소리를 위해 9개 부분으로 구성된 연가곡이다. '일뤼미나시옹(Illumination)'은 1886년 '라 보그'를 통해 처음 발표된 산문시인데 랭보가 기억하는 파리의 풍경이 물씬 담긴 곡이다.
넉넉히 보았다. 환각은 어디든 서로 가로질러 만난다.
충분히 가졌다. 도시의 소문들은 늦은 밤이나, 한낮에도 늘 존재한다.
알 만큼 알았다. 생의 멈춤이여. 오오! 온갖 소란과 환각들이여!
새로운 애정과 소요 속으로 떠나자!
다소 난해하고 혼란스럽다는 평이 있는 벤저민 브리튼의 일뤼미나시옹은 직접 듣고나서야 비로소 그 뜻을 단번에 이해했다. 마치 연금술사의 신기루를 보듯 경이롭고, 적당히 현대적인 프랑스식 음악은 마치 최면에 걸린 관객들을 깊은 물가로 인도하는 기분이었다. 흥미로운 듯 그러나 적당히 우울한 이 음악은 어떠한 설명으로도 비유가 되지 않는 이상한 매력 또한 갖고 있다. 가사는 이러한 선율에 힘을 실었다. 난해하지만 매혹적인 가사, 혼돈과 무질서가 존재하는 가사는 관객들에게 분명 신선함을 선사했을 것이다. 영화의 한장면이 눈 앞에 보이듯 '환각에 빠진 사람'과 '예민한 도시의 모습'을 연상케 했고 에드워드 엘가 <현을 위한 세레나데>, 차이콥스키 <현을 위한 세레나데>와는 단연 대비되는 모습을 보이며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최수열과 임선혜의 합은 '역시나'였다. 베테랑 두명이 만나 21분짜리 단편 프랑스 영화를 만들었다. 임선혜가 펼치는 장면과 대사 전달력, 최수열이 만들어가는 그만의 OST는 눈앞의 신기루 한장면 그자체였으리라. 서울시향은 '일뤼미나시옹'은 그저 '듣는 것'으로 시간과 공간 차를 두고 조우한 두 거장의 걸작을 만날 수 있는, 황홀한 정신의 모험을 떠나는 여정이 될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보는 것'에 치중되어 있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그저 '듣는 것'은 어쩌면 낯선 감각으로 변해버린 시대일지도 모른다. 눈 앞에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이미지와 영상 속에서 우리는 이 날 '듣는 것'만으로도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신비한 경험을 겪었을 것이다. 이 날 공연을 놓친 모든 이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하고 싶을 정도다.
*이 리뷰는 서울시향 서포터즈 활동 중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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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SPO> 3월호. 김문경 음악 칼럼니스트.
자료 | 서울시립교향악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