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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의 포트폴리오 Apr 20. 2021

23분간의 실험, 서울시향 '말하는 드럼'

[REVIEW]

23분간의 실험, 서울시향 '말하는 드럼'



필자는 현대음악을 비교적 좋아하는 편이다. 여기서 '비교적'이란 말을 쓴 이유는 그다지 엄청 좋아하지도 않다는 뜻이다. 이런 표현이 어울리지 않겠지만, 참 쌀국수 위 '고수' 같은 존재다. 호불호가 확실하지만 한번 맛의 매력을 느끼면 계속 찾게되니 말이다. 클래식의 기존 형태를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호'가 될 수도, '불호'가 될 수도 있지만 이번 서울시향의 '말하는 드럼'은 모두에게 '호'였으리라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퍼커셔니스트 박혜지 ⓒ서울시향


지금의 많은 교향악단과 연주자들이 자신의 프로그램에 현대음악을 포함시킨다. 불과 4-5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클래식만의 '클래식함'을 추구하는 경향이 조금 더 강했던 예전 분위기를 생각하면 '현대음악'은 돈벌이가 안되는 애물단지 장르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서울시향에 오래 몸을 담았던 진은숙의 '아르스 노바'가 그 예 중 하나다. (물론 그녀의 사임 이유는 복합적이었고 이것이 대표 예는 아님) 하지만 시간이 지남과 동시에 클래식계의 동향은 시대에 맞춰 변화되었고 우리는 어느샌가 현대음악을 받아들일 '준비된  관객'이 되었다.


폭발하듯 반짝이는 음향의 마법사


지난 <SPO> 2월호에서 강지영 칼럼니스트는 페테르 외트뵈시를 이렇게 설명했다. '폭발하듯 반짝이는 음향의 마법사'라고. 그녀의 말에 따르면 그는 '구조'라든가 '구성' 같은 서구 음악 전통이 부여하는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리고 '소리'에 대한 즐거운 상상력을 과감하게 펼쳤다. 그녀의 익살스러운 표현에 공감을 던진다. 15일(목) 퍼커셔니스트 박혜지에 의해 연주된 페테르 외트뵈시의 '말하는 드럼'은 그야말로 '소리'에 대한 실험 그 자체였다. 사람의 목소리와 드럼의 목소리가 섞였던 연주였다면 이해가 될까?


이 곡은 연주자가 스틱을 수직으로 세워 드럼을 치는 것으로 시작된다.이내 아무런 의미 없는 소리를 내뱉는다. 드럼을 치던 리듬과 의미 없는 소리의 리듬이 동일하다. 프로그램 설명에 나와있듯 이 행위는 '무엇을 말하려는지'에 대한 것이 아닌 '어떻게 말하려는지'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어떤 말을 하는지 알 순 없어도 동일한 리듬을 내뱉는 연주자의 목소리와 드럼의 소리는 청중에게 반복된 리듬을 세뇌시켜 청각적 자극을 느끼게 한다.


이 날 단연 돋보였던 것은 퍼커셔니스트 박혜지의 움직임이었다. 그녀의 동선을 바로 앞에서 볼 수 있었다는 것이 큰 행복이었고 음대 출신으로서 '이 곡을 그간 어떻게 연습했을까...' 그 노력에 감탄이 절로 나온 순간이었다. 또한 공연을 앞두고 미리 들어본 해외 연주자들의 목소리보다 그녀의 목소리가 더 힘있고 단단했다. 중간에 선보인 퍼커션 단원들과의 짧은 연기(?)에 나를 포함한 관객들은 웃음을 터뜨렸고 이런 소소한 부분들이 현대음악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소끔 돕지 않았나 생각한다.


오스모 벤스케 ⓒ서울시향


한국으로 오랜만에 돌아온 오스모 벤스케의 지휘 또한 놓칠 수 없다. 그의 역동적인 지휘는 그야말로 개운함을 선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울시향의 연주도 지난 2번의 공연 때보다 더 힘있고 디테일해진 것은 비단 홀로 느끼는 느낌은 아닐 것이다. 능숙하게 단원들을 이끄는 오스모 벤스케의 지휘에 나 또한 지휘봉 끝을 집중하게 만들었다.


200년 전 베토벤은 괴짜 그 자체였다. 자신이 마실 커피 콩 개수마저 세어가며 마셨고 헝클어진 머리와 우스꽝 스러운 옷차림은 그의 독특함을 설명했다. 그의 음악은 당대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형식의 음악이었고 그 당시의 '현대음악'이었다. 누군가에게 베토벤의 음악은 '호'였을 수도, '불호'였을 수도 있다. 현재 우리 모두에게 '호'인 베토벤의 위대한 음악은 당시 현대음악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15,16일 이틀에 걸쳐 연주된 페테르 외트뵈시의 '말하는 드럼'이 누군가에게 '호'였을 수도, '불호'였을 수도 있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현대'의 정의가 매일 변화하듯 지금의 현대음악은 훗날 베토벤의 음악처럼 모두가 인정하고 즐거이 받아들이는 시대가 반드시 올 것이다. 그리고 그 날은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관객의 환호가 그것을 입증한다.



*이 리뷰는 서울시향 서포터즈 활동 중 작성된 글입니다.












글쓴이 P의 포트폴리오

이메일 wheniwasyour@naver.com

블로그 https://blog.naver.com/ekqekq777/222314741741

참고 | <SPO> 4월호. 강지영 음악 칼럼니스트.

자료 | 서울시립교향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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