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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새란 Mar 26. 2024

03 해 먹는 일

※ 2024년 3월 3일, 작업실103호 모임에서 '손맛'을 주제로 작성한 글입니다.



번쩍, 하고 눈이 떠졌다. 밖이 아직 깜깜한 걸 보니 이른 시간인 것 같아 손을 더듬어 휴대전화를 찾았다. 6시. 50분 정도는 더 잘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정신이 들자마자 강한 허기가 몰려왔다. 아침엔 보통 그릭요거트에 과일을 먹거나, 간단한 오이샌드위치를 만들어 먹는 정도가 전부였는데, 오늘은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 것 같다는 직감이 몰려왔다.


미역국이 먹고 싶었다. 정확히는 따끈하게 끓여진 미역국에 밥을 말고, 매 숟갈 아삭한 김치를 올려 먹고 싶었다. 눈뜨자마자 어떤 음식을 이토록 먹고 싶었던 적은 처음이다. 그것도 미역국이라니. 뱃속의 망고가 얼른 일어나라고 재촉하는 것 같았다. 5분 정도 고민을 하며 뒤척이는데, 집에 늘 있는 자른 미역과 며칠 전 사 둔 국 간장, 참치 통조림, 참치액이 떠오르며 금방 끓여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나는 스스로를 먹이는 데 소홀한 사람이었다.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고, 먹는 것을 사랑하지만, 재료를 이해하고 조리법을 익혀 한 끼 식사를 차려내는 일에는 흥미가 없다고 여겼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냉동 음식이나 배달 음식과 친하게 지내왔다. 그런데 요즘은 아주 조금씩 변화가 생기고 있다. 임신 후, 4시면 퇴근하는데 저녁 약속을 거의 잡지 못하고 있어 무언가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여력이 좀 생겼기 때문이다. 망고를 생각하면 마냥 밖에서 사 먹는 음식만 먹을 수는 없단 생각도 한몫했다. ‘시간이 생기니 뭘 좀 해 먹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을 보면 어쩌면 요리에 흥미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여유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요리를 좀 해보려 부엌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더니 간장, 식초, 올리고당, 참기름……. 어느 하나 유통기한을 넘기지 않은 재료가 없었다. 그동안 얼마나 요리하지 않고 살았던 것인지. 평소 같았으면 몇 가지는 눈 딱 감고 사용했겠지만, 배 속의 아이와 함께 먹는다고 생각하니 그럴 수가 없어 죄책감을 느끼며 죄다 버리고 말았다. 그러고는 너무 크지 않은 용량으로, 꼭 필요한 것들 위주로 하나하나 다시 구입하며 찬장을 채웠다.


그러니까, 미역국을 먹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새벽부터 번쩍, 하고 눈이 떠졌던 그날엔 어느 정도의 기본양념이 든든하게 기다리고 있어 부엌으로 당당히 걸어 나올 수 있었다. 게다가 미역국은 몇 안 되는, 쉽게 생각하는 요리 중 하나였다.


자그마한 냄비에 물을 받고, 미역을 불렸다. 참치를 꺼내어 기름을 따라내고, 필요한 재료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올렸다. 아직 미역이 덜 풀어졌지만 끓이다 보면 불겠지 하는 맘으로 반쯤 풀어진 미역의 물기를 짜주었다. 냄비를 불 위에 올려 물기가 날아가게 둔 다음, 참기름을 넉넉히 둘렀다. 참기름이 어느 정도 달아올랐을 무렵 미역을 넣었다. 치익- 하는 소리와 고소한 냄새가 퍼져 나갔다. 적당히 볶다가 참치를 넣어 마저 볶았다. 참치로 미역국을 끓인다고 하면 주변에서 낯선 표정으로 되묻는 사람들이 많은데, 어릴 때부터 엄마가 해주는 참치 미역국을 맛있게 먹어온 나로서는 그들의 표정이 더 낯설었다. 생선이나 참치 통조림을 크게 싫어하지 않는다면, 꼭 끓여 먹어보실 것을 추천한다. 재료들이 적당히 볶아졌다면 물을 넣을 차례. 넉넉하게 물을 넣고서 끓기를 기다린다. 간은 국간장 한두 스푼과 참치액 조금이면 충분하다. 팔팔 끓어오를 때 간을 보고서 부족한 부분을 채우면 끝.


얼려둔 밥을 전자레인지에 돌리고, 미역국을 말아 놓은 다음 김치를 꺼내 식탁에 앉았다. 그 새벽에 일어나 밥을 차려낸 내 모습이 좀 웃기긴 했지만, 그토록 맛있는 미역국은 처음이었다. 열심히 밥을 먹고 있는데, 잠에서 깬 남편이 신기하다는 얼굴로 거실로 나왔다. ‘미역국을 먹어야겠어!’하고 이불을 박차고 나간 나를 보고 다시 잠이 들었는데, 미역국 냄새에 잠에서 깼다고 했다. 간단하지만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친 그날 아침 이후 뭔가 해 먹는 일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됐다.


자신을 위해 국 하나 끓여내는 것만으로 뿌듯해하는 나를 돌아보면서, 따끈한 국에 든든한 메인 반찬에 곁들여 먹는 다양한 기본 반찬들까지 가득 차려내는 엄마의 식탁이 떠올랐다. 매일 식구를 위해 하루에 두세 끼, 식탁을 채워 온 엄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어릴 땐 식사 시간이 되면 뚝딱하고 밥이 차려진다고 생각했는데, 얼마나 많은 고민과 손길이 닿아 있었을까.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차리는 기쁨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한 끼를 차리고 돌아서면 다음 끼니를 생각해야 하는 고단함이 커다랗게 몰려오는 날도 많았을 것이다. 곧 엄마가 되면, 엄마가 겪었을 기쁨과 고단함을 조금씩 알아가겠지. 조금씩 달라지는 나의 일상을 더 세심하게 돌아보고 살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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