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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새란 Mar 26. 2024

05 망고에게

※2024년 3월 26일, 작업실103호 모임에서 '나를 지배하는 것들'을 주제로 작성한 글입니다.



망고야, 언젠가 너에게 편지의 형식을 빌려 한 편의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작업실 103호에서 동료들과 함께 글을 쓰는 주제를 받아 들자마자 ‘지금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나의 어딘가에서 영문도 모른 채 이것저것을 하나하나 만들고, 키워가고 있는 너를 생각하면 여전히 조금은 이상한 감정이 들어. 나보다 훨씬 빠르게 뛰는 심장을 가진 네가 분명히 내 안에 있는데, 실감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거든. 몇 주에 한 번 병원에 가서 초음파로 너의 모습을 보고, 아주 작지만 가열차게 뛰고 있는 심장의 소리를 들을 때만 실감이 난다고 해야 할까. 그러니 마냥 애틋해하기엔 가끔 좀 겸연쩍을 때가 있어.


그런데, 며칠 전부터는 마냥 몰랑하던 아랫배가 조금씩 단단하게 부풀어 오르고 있어서 애틋함이 좀 생겼어. 가만 누워서 동그란 배를 쓰다듬다 보면, ‘이 속에 망고가 있겠구나.’ 싶어 전보다 조금 더 너와 가까워진 기분이 들어. 아직은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지만, 만약 곧 너의 움직임까지 느낄 수 있게 된다면, 그땐 아마 애틋한 마음이 당당히 들지 않을까, 싶어.


망고야, 우리는 엊그제 비행기 티켓을 취소했어. 5월 초에 뱃속의 너와 함께 시드니로 떠나보자고 계획을 세웠었거든. 아기가 태어나면 한동안은 자유롭지 못하니, 많은 예비 엄마 아빠들이 해외로 여행을 가곤 해. 가까운 곳에 갈까 하다가, 새로운 대륙에 가보고 싶단 욕심이 나서 시드니행을 결심했어. 평소에 건강을 자부하는 편이니 조금 긴 비행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았어. 티켓을 결제하고, 숙소를 알아보고, 먼저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의 브이로그를 보면서 꽤 설레는 시간을 보냈던 것 같아. 그런데, 지난 진료에서 선생님께서 단호하게 말씀하시더라고. 해외여행은 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아직 결정한 게 아니라면, 행선지를 국내로 바꿔서 알아보라고. 맞아. 망고가 다리를 다소곳이 오므리고 있어서 남자아이인지, 여자 아이인지 비밀로 해서 우리를 애태웠던 그날 그 진료에서 말이야.


그 말을 듣고서 아무렇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우리는 생각보다 단순하고 의연하게 선생님의 말을 받아들이기로 했어. 여전히 건강하게 뛰는 심장 소리를 들려주고, 특별한 이상 없이 잘 자라고 있는 너를 흑백의 화면을 통해 보고 나니, 다른 건 하나도 중요하지가 않더라고. 그거 알아? 이전까지는 정수리부터 엉덩이까지의 길이를 재서 망고가 얼마나 자랐나를 확인했는데, 이제는 머리둘레와 허벅지 뼈 길이로 성장을 확인해. 이제 다음에 병원에 가면 초음파로 한눈에 너를 볼 수가 없대. 그러니까, 처음에는 작은 점이던 네가, 초음파로 한 컷에 잡히지 않을 만큼 쑥쑥 자라나고 있다는 거야.


어쩌면 나는, 해외여행을 가지 말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을 듣고 한 편으로 좀 안심했던 것 같기도 해. 호기롭게 시드니행 티켓을 끊어놓고 좀 불안했나 봐. 너와 함께하는 시간 동안 스스로 자신했던 것들이 전처럼 쉽지 않아 지는 일들을 종종 경험하고 있거든. 두 시간이면 걸었던 코스를 세 시간 동안 걸어야 하고, 두 칸씩 척척 오르던 계단을 한 칸 한 칸 올라도 숨이 쉽게 차오르고, 몇 년 간 걸리지 않던 감기가 찾아오기도 했으니. 값비싼 수수료를 치르면서 취소 버튼을 누르는데 마음 한쪽 구석이 좀 후련하단 생각이 들었어. 혹시나 네가 자라고 나서, 엄마가 태교 여행으로 시드니에 못 간 것을 후회하는 듯한 말을 한다면 꼭 이 편지를 보여줘.


망고야, 단언하건대 너라는 존재에게 지배받고 있는 지금의 일상이 소중하고 감사해. 너로 인해 알게 되는 사소한 감정들을 잊지 않으려 노력할게. 이제 고작 16주인데도 이토록 다양한 마음이 드는데, 네가 태어나고, 자라는 순간에는 얼마나 많은 색깔들이 내 앞에 펼쳐질까. 기대도 되고 겁도 난다.


그러나 저러나, 우리에게 와줘서 진심으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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