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2월 4일, 작업실103호 모임에서 '외로움을 극복하는 법'을 주제로 쓴 글입니다.
“제 인생의 목표 중 하나가 한 해에 오래 갈 인연 한 사람씩을 만드는 건데, 올해의 인연은 여기에서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때는 이 거창한 목표를 충분히 실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2013년 1월, 60여 명 앞에서 떨리는 마음을 붙잡고 내뱉은 말이었다. 방송작가가 되고 싶어서 신천역 근처의 오래된 건물에 모여 앉은 첫날. 한 명씩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하는 그 중요한 순간에 자못 진지한 표정을 하고 의미심장하게 말했을 것이다. 그날의 자기소개를 기억하는 청자는 아마 아무도 없을 테지만, 새로운 경험과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에게는 꽤 중요한 화두가 담겨있는 말이었다. 실제로, mbc 아카데미 구성작가반 43기 중 지금도 연락하며 지내는 사람은 여럿 있으니 어느 정도는 유효한 말이기도 하다.
30대 중반이 된 지금엔 저 한마디를 실현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알게 됐다. 물론 인스타그램 친구가 되어 서로의 일상을 느슨하게 바라보며 오래 아는 사이가 될 수는 있겠지만, 분기나 반기에 한 번 얼굴을 마주하고 속엣말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를 매년 한 명씩 늘려가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단 생각이 든다.
인간관계가 단절됐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하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새로운 사람들을 알게 된다. 어느 날엔 클라이밍 수업이 끝나고 대여섯 살 어린 친구들과 맥주잔을 부딪치며 회포를 풀기도 하고, 어떤 때엔 전전 직장 동료와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하고 근황을 나눈다. 매주 목요일에 함께했던 글쓰기 모임에는 들고 나는 이가 종종 있어 낯선 얼굴이 익숙한 얼굴이 되는 경험도 꽤 자주 한다. 독립출판을 하고, 이 세계를 사랑하게 된 이후에는 독립서점 멤버십을 통해서도 새로운 인연이 생겨나고, 함께 책을 만들고 페어에 나갔던 팀원들과는 작업을 함께 하는 모임을 만들기도 했다.
다종다양한 인연의 고리가 생기다 보니, 20대 중반까지 꽤 공고하게 여겼던 ‘내 사람’이라는 경계선이 사라진 느낌이다. 적당한 거리에서 각자의 삶에 간섭하지 않으면서 상대방을 향한 얕은 응원의 마음을 지니는 관계가 많아졌다. 자연스러운 흐름이라 생각하지만 때때로 씁쓸할 때는 있다. 헛된 인연은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헛헛한 마음이 불어올 때가 있는 것이다. 결혼하고 매일 온기를 나누며 사는 사람이 있으니, 전보다 자주는 아니지만, 한 번씩 낯선 외로움이 찾아온다. 오늘의 감정을 소상히 늘어놓고 공감받고 싶은데, 가족 외에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괜스레 카카오톡 친구목록을 오르락내리락 살피다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는 아케이드 게임을 하거나, 유튜브를 켜고 ‘그알’ 같은 채널의 콘텐츠를 본다. 그러다 보면 또 커다란 파도는 지나간다.
‘추석이란 무엇인가’라 묻는 칼럼으로 유명한 김영민 교수님은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책에서 “잘 사는 사람은 허무를 다스리며 산책하는 사람이 아닐까. 그런 삶을 원한다. 산책보다 더 나은 게 있는 삶은 사양하겠다. 산책은 다름 아닌 존재의 휴가니까."라고 했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허무의 작은 유형 중 하나가 ‘외로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의 여러 허무 중 하나인 외로움 또한, 극복하기보다는 다스리며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외로움을 다스리는 일은 무엇보다 어려운 일일 것이다. 나의 마음과는 무관하게 몰려오는 감정의 먹구름 같은 거니까. 그럴 때 나는 주로 나와의 약속을 만든다. 가만히 집에 머무르면 먹구름이 이내 마음을 뒤덮어 가라앉고 마니까. 그렇게 되기 전에 몸을 일으켜 어디로든 나가 본다. 언젠가 지도에 표시해 둔 가게가 한두 군데 정도 있는 동네가 좋다. 망원동이나 후암동도 좋고 북촌이나 서촌도 좋다. 노트북이 든 묵직한 백팩을 메고 책방에 가서 책을 산 다음, 커피가 맛있는 카페를 찾아 자리를 잡는 것이다. 앉아서 책 한 권을 뚝딱 읽는다거나, 글 한 편을 써내는 생산적인 활동은 하지 않는다. 손에 잡히는 책을 조금 읽다가,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며 멍하게 있다가, 인스타그램 피드를 구경하다가, 노트에 떠오르는 단상을 잠깐 끄적여본다.
그렇게 별것 아닌 시간을 보내고 나면, 조금씩 일상의 햇살을 맞이할 마음이 된다. 내 곁에는 여전히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자주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도 서로를 생각하는 친구가 있고,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지인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알아채게 된다. 외로움이 몰려들면 사라진 것 같았던 나를 둘러싼 인연의 고리가 나름의 방식으로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