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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새란 Aug 19. 2023

활착

사유의 방과 기록에 관한 강연

무더운 날씨에는 땀에 흠뻑 젖을 생각으로 걷는 편이 좋다. 천연덕스럽게 맑은 날씨에 이끌려 걷기로 마음먹으면 얼마 가지 않아 콧등과 인중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게 느껴진다. 땀 한 방울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기도 하고 무릎이 촉촉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직사광선을 받는 얼굴과 팔뚝에 뜨거운 빛이 파고드는 느낌도 든다. 그러다 곳곳에 있는 그늘을 만나면 찌푸렸던 인상을 펴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쉰다. 다음 햇볕으로 나갈 태세를 하는 것이다.


이촌동에서 저녁 6시에 열리는 강연에 참석하려고 4시에 조퇴했다. 강연장 인근에 국립중앙박물관이 있었는데, 국립중앙박물관 2층에 있는 ‘사유의 방’에 꼭 가보고 싶었다. 아주 여유로이 거닐 수 있는 시간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바쁜 일정 사이에 잠시 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20분 남짓, 박물관에 머무르면서 새로운 행복감을 맛봤다.


도심 속에 넓게 펼쳐진 박물관 앞마당은 답답함을 날리기에 좋았고, 아름답고 웅장한 박물관 건물 자체도 좋았고, ‘사유의 방’은 말할 것도 없었다. 고요함이 머무는 사유의 방에서 잠시 서서 가만히 반가사유상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잡다하게 몰려들어 마음을 어지럽히던 작은 생각들은 가라앉고, 그냥 마음이 이끄는 방향으로 가도 좋다는 위안을 얻었다. 밖으로 나와서는 몇 개의 전시실을 둘러보았다. 하이얗고 동그란 달항아리를 마주했을 땐 사유의 방에서 가라앉았던 잡생각이 씻겨져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밖으로 나오니, 절로 걷고 싶었다. 따가운 햇살이 따사롭게 느껴졌다. 습한 공기도 버틸만했다. 그렇게 30분 정도 낯선 길을 따라 걸었다.


-

‘기록을 포기하고 싶었던 적이 있으셨나요?’


그날 강연의 제목은 “나만의 이야기가 담긴 영감의 기록”이었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게 취미』를 쓴 김신지 작가님과, 『기록의 쓸모』를 쓴 이승희 작가님이 함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자리였다. 나는 두 작가님의 빅팬이라 이 조합을 놓칠 수 없었다.


두 분은 각자의 기록 방식과 기록의 역사를 소개했다. 기록의 중요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때는 공통점이 넘치다가, 기록의 방식을 소개할 때는 차이가 보여서 재미있었다. 기록은 결국, 각자의 방식으로 일상을 물들이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기록을 포기하고 싶어지면, 그냥 안 했던 것 같아요.”


강연 후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에서 한 작가님이 이렇게 답했다. 좀 이상한 포인트였을 순 있겠지만 그 순간 깨달았다.


그때까지 나는 기록을 못하는 사람이라 여겼다. 나도 이승희 작가님처럼 적당한 크기의 노트를 수십 권 채워보고, 나도 김신지 작가님처럼 노션에 잘 정돈된 글감 서랍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노트와 다이어리의 후반부가 깨끗하기 일쑤인 나는 기록을 못하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5년 다이어리를 사서 한 달도 채우지 못하는 나는 기록과 거리가 멀다고.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나는 꾸준히 기록을 하는 사람이었다. 일을 할 때는 매일의 업무일지를 적으며 일의 진행 상황을 체크하고, 책을 읽고서는 매번 표지를 찍어 짧은 감상과 함께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매주 목요일 글쓰기 모임을 운영하면서 기록이 될 글을 남기고, 글쓰기 모임 인스타그램도 매주 참석자와 글 제목을 적어 업데이트한다. 갑작스럽게 글감이나 생각이 떠오르면 카카오톡 ‘나와의 채팅’에 던져두고, 연말에는 한 해를 돌아보는 결산을 하기도 한다. 기록을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록의 방식이 달랐을 뿐인 거다. 그런데, 이건 비단 기록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8월 첫 주, 지난해 반년 정도 열심히 했던 클라이밍을 다시 등록했다. 첫 수업을 받고서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너어무 재미있다고 떠들다가 문득 웃음이 났다. 지난겨울에 등록했던 요가 첫 수업 때도, 올봄에 등록했던 킥복싱 크로스핏 첫 수업 때도 너무 재밌다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기 때문이다. 재미있게 시작하는 것과 재미있게 지속하는 일은 다른 차원의 일이다. 진짜 나와 잘 맞는지는 시간이 지나 봐야 안다. 어떤 것을 지속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면 굳이 억지로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공원을 가꾸는 분과 이야기를 하다가 ‘활착’이라는 단어를 알게 됐다. 옮겨 심은 나무가 잘 자라기 위해서 그 땅에 뿌리를 내리는 일을 활착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여러 시도들 중 나의 일상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말라가는 것들보다, 활착하고 푸른 잎을 돋아내는 일들에 물을 주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다만, 이 이야기의 전제는 계속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시도가 어떤 땅에서 뿌리내릴지 모르니까. 그리고, 혹시 미련이 남는 과거의 시도가 있다면 그 역시 적당한 때에 또 시도해 보면 좋을 것이다. 지난겨울 활착하지 못했던 시도가, 이번 봄에는 꽃을 피울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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