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모임 주책
고백하자면, 그날의 기억이 아주 또렷하지는 않다. 셔터를 눌러 찍어둔 사진처럼 몇 장의 장면으로만 남아있을 뿐(이 글에 나오는 다량의 디테일한 정보들은 기록 덕에 건진 것임을 밝혀둔다). 종각역의 한 카페에서 우리는 어색한 얼굴을 하고 모여 앉았다. 안녕하세요. 자그마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고서, 주섬주섬 각자 가지고 온 책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을 것이다. 가장 좋아하는 책이라거나, 소개하고 싶은 책을 가지고 오는 것이 그날의 미션이었다.
그날 아침, 책장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다 지금도 좋아하는 소설로 손꼽는 양귀자 작가님의 『모순』을 챙겼다. 누군가는 김금희 작가님의 『경애의 마음』을, 누구는 임경선 작가님의 『태도에 관하여』를, 카프카의 『변신』을, 존 르 카레의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를, 마스다 미리의 『5년 전에 잊어버린 것』을 이름표 대신 자신의 앞에 올려두었다. 우리는 유난스럽지 않게 서로가 가져온 책을 소개하며 첫인사를 했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각자의 빛깔이 묻어나는 책이었다.
2018년 11월 14일, 그날 이후 우리는 2주에 한 번씩 만났다. 한 번은 문학, 한 번은 비문학. 취향이 아닌 책이라도 서로를 의지하며 함께 읽어 나갔다. 책을 정하는 날도 있었고, 주제를 정하는 날도 있었다. 술잔을 기울이며 나누는 대화는 때로 날카로운 논쟁이 되기도, 통쾌한 공감의 시간이 되기도 했다. 신기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책을 매개로 만나, 술을 꽤나 많이 마셔대면서도 얼굴을 붉히지 않고 즐거운 대화를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이. 페미니즘, 중동의 분쟁, 한국 사회의 문제 뭐 이런 주제를 두고서 서로의 생각도 다르고 주장도 강한 이삼십 대가 모여 앉아 논쟁을 언쟁으로 키우지 않는다는 점이.
술이 곁들여진 모임이었기에 만남의 농도는 짙었지만 지켜야 할 선은 지켰다. 어느 정도였냐면, 첫 모임 이후 9개월이 지난 후에도 서로의 전화번호를 몰랐고, 서로를 땡땡님이라 칭하며 극존칭을 썼다. 그 무렵부터 우리는 정식 모임 외에도 조금씩 자리를 만들었다. 책 얘기에 더해 사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됐다. 도서관에서 일하는 모임장님의 일터에 찾아가기도 하고, 맛있는 소곱창을 먹기도 하고, 함께 영화를 보거나, 노을이 아름다운 노들섬에도 갔다. 모임이 1주년을 맞이했을 때는, 차를 끌고 파주로 향했다. 지혜의 숲에서 책에 파묻혀 휴식도 하고,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에 가서 전시를 관람하기도 했다. 추억이 쌓이며 우리는 친구가 됐다.
스쳐 지나간 인연도 많았다. 쌓여있는 사진을 보면 피식 웃음이 나오는 반가운 얼굴들이 참 많다. 인연이란 게 묘해서, 여기에서 만났다가 저기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도 있다. 물론, 다시는 연락을 하지 않을 사람들도 꽤 된다.
독서모임 ‘주책’의 입장에서는 나 역시 스쳐 지나간 인연 중 하나일 것이다. 모임은 이미 4주년을 훌쩍 넘겼고, 나는 2주년을 함께 맞이하지 못하고 모임에서 탈퇴했다. 여러 이유가 있었다. 오랜 시간을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나에게 주책의 의미는 남다르다. 존댓말을 썼다가 반말을 썼다가 하며 편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언니, 오빠, 친구, 동생을 얻었고,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면서 생각을 키워갈 수 있다는 점을 배우기도 했으니까.
9월에는 모임 이후 꾸준히 만나고 있는 몇몇 이들과 만나기로 했다. 좀 주책맞은 말일 수 있겠지만 내가 그러하듯, 그들도 이 모임이 특별한 의미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