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근이 일찍 끝날 것 같은데, 사무실에 들어가기는 애매한 시간이 될 것 같아 조퇴를 신청했다. 마침 일정을 마치는 장소 근처에 좋아하는 공간도 있겠다 여유를 좀 즐겨보자고 생각했다. 한 시간 반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인터뷰를 하고 사진을 찍다 보니 어느새 두 시간 십 분이 지나고 있었다. 가려했던 곳은 카페이자 작업실에 최근에 독립책방을 오픈한 곳이었다. 양재천의 여유로운 풍경을 바라보며 맛있는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곳이라 커피를 한잔 하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조퇴를 해놓고 퇴근길의 복잡함을 느끼기는 싫어서 그냥 책방만 들러 보기로 마음을 바꿔 먹었다.
습기를 머금은 양재동을 천천히 걸었다. 피자 조각 모양으로 생긴 매헌시민의 숲을 지나면서는 발걸음이 조금 더 느려졌다. 장마철 공원은 초록을 뿜어내는 모양새라, 그 속에 있는 것만으로도 정화가 되는 기분을 준다. 부러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으면서 물기를 머금은 잎사귀들과 무표정한 얼굴로 산책하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초록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조용히 놓여있는 벤치를 마주했을 땐 부러운 마음이 들어 사진에 담았다.
최근에 비가 꽤 온 탓에 넘친 흔적이 남아있는 양재천을 건넜다. 이제 목적지가 코앞. 지하의 책방으로 곧장 내려가 책을 살펴봤다. 오기 전에 살까, 생각했던 책은 다음에 사기로 하고, 그곳에서 처음 본 작가님의 처음 본 책을 샀다. 공간을 운영하는 작가님이 그린 엽서도 두 장을 샀다. 계산을 할 무렵, 책방에서 일하는 스태프분께 사실 제가 저 책을 쓴 사람인데요. 잘 부탁드립니다. 하며 뚝딱임 속 진심이 가득 담긴 인사를 건넸다. 스태프분은 아주 친절하게 인사를 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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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집 근처 역에 내렸다. 집으로 향하는 길, 늘 ‘sold out’이라는 안내판이 걸려있던 소금빵집에 어쩐 일인지 불이 켜져 있다. 이끌리듯 들어가서 소프트 소금빵 하나, 커스터드 소금빵 하나를 샀다. 아, 이 집은 하드 소금빵이 제일 맛있는데. 역시 사람들 입맛은 비슷한지, 진작에 다 나갔단다. 투명한 비닐봉지에 투명하게 개별 포장된 소금빵이 두 개 들어있었다. 이 빵을 갑자기 지금 당장 먹어야겠단 생각이 들어서 집으로 가는 인적 드문 골목길에서 소프트 소금빵을 꺼냈다. 한입 베어 무니 버터를 가득 머금은 바삭한 바닥과 짭짤하고 쫄깃한 빵의 질감이 느껴졌다. 길거리에서 음식을 먹는 건 정말 오랜만. 썩 선호하는 부류의 행동은 아닌데, 이상하게도 오늘은 행복으로 느껴졌다. 이런 행복이라면 얼마든지 누려도 괜찮을 것 같았다.
“사장님 아사히 생은 없죠?”
집으로 가는 길 곳곳에 있는 CU와 GS25에 들러 물었는데, 역시나 돌아오는 답은 부정적이었다. 어플에서 사전 예약을 할 수 있다더니 그것마저 쉽지 않았다. 소금빵을 거의 다 뜯어먹어 갈 때쯤, 무심코 고개를 돌렸는데 아사히 생맥주가 박스 떼기로 쌓여있었다. 집 근처의 주류 판매점이었다. 남편에게 사진을 찍어 보내고, 이리로 좀 와 보라고 전화를 했다. 무알콜맥주 몇 개와 생맥주캔 한 박스를 계산하고서 남편을 기다렸다. 남편은 가게 문 밖에 쌓인 박스를 골똘히 보더니, “한 박스 더 사면 안돼?”라고 물었고, 결국 두 박스를 이고 지고 집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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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심차고 세세한 일정을 가득 채워 하루를 시작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그 일정에 모두 체크 표시를 해나갈 필요는 없다. 오늘은 정말이지 내 맘대로 흘러간 하루. 아니지, 이게 내 맘대로 흘러가는 하루인 건지, 내 맘 같지 않게 흘러가는 하루인 건지 잘 모르겠다. 이런 하루를 보내고 나면, 이 나이를 먹고서도 아직 나를 잘 모르겠다. 한동안 바짝 열심히 살았는데 그때의 나도 좋고, 맘 가는 대로 하루를 채우는 나도 뭐 딱히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이럴 때가 있으면 저럴 때도 있는 것.
이런 나도, 저런 나도 받아들이는 것. 어쩌면 그게 중요한 걸지도. 살찌기 딱 좋은 소금빵과 생맥주캔을 마시고서 흡족한 하루도, 하루 만보를 걷고서 주어진 운동을 완벽하게 해내고 집에서 물만 마시고 잠드는 건강한 하루도, 행복했다면 된 것으로.
2023. 7.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