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영국 아일랜드
Day 41, 7월 22일, 낭시(Nancy)
스트라스부르의 조용한 주택가의 깨끗하고 편리한 숙소에서 편안한 2박 3일을 보냈다. 여행 초반에는 작고 한적한 지방의 소도시들을 주로 방문하다가, 큰 도시를 방문해서 국제기구 견학도 하고 대성당도 둘러 보았다. 이제 여행 초반이 마무리되고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5일 후에 파리에 입성하게 되면 대략 여행의 중반 지점에 이르게 된다. 벌써부터 복잡한 파리에 가서 렌트차를 제대로 반납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가 올라오지만 애써 무시하고, 오늘에 집중하기로 하자.
스트라스부르에서 낭시까지 매우 편안한 2시간의 운전이 되었다. 평탄한 도로와 나무들, 작은 마을들을 지난다. 이제 프랑스에서 운전하는 것은 완전히 익숙해져서 오래 이곳에 살고 있는 현지인처럼 느껴진다. 수많은 작은 로터리들을 부드럽게 통과한다. 이게 뭐 대단한 것도 아닌데, 언제고 프랑스에 다시 오게 된다면 두려움 없이 운전대를 잡게 되었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리스트 목록에 하나가 추가되어 뿌듯하다.
낭시에 도착하여 주차를 마쳤다. 점심으로 스타벅스에서 샐러드와 샌드위치를 먹었다. 프랑스에 와서 스타벅스를 처음 본 것 같다. 메뉴는 한국과 비슷한데, 청결도는 다소 미흡하다.
스타니슬라스 광장 (Place Stanislas)으로 향한다. 여행 계획표에 낭시에서의 일정은 이 광장 외에 적혀 있지 않았다. 니스부터 스트라스부르까지 이어지는 방문지들은 기대를 많이 했던 지역이고, 이후 루아르의 고성들도 프랑스의 왕족들이 지냈던 많은 성들을 볼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낭시는 이동 거리가 길어서 하룻밤 머무는 도시 정도로 생각을 하고 특별한 계획을 세워두지 않았다.
요즘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한 사실이 있다. 큰 기대 없이 보내는 일상이 소중하고 그 속에 잔잔한 삶의 진리가 있다는 것이다. 아무 계획도 부담도 없이 방문한 낭시에서의 시간이 긴 여행의 여백처럼 쉼표처럼 오래 기억에 남는다.
스태니슬라스 광장은 가로 124m 세로 106m 규모의 사각형 모양이다. 광장에는 시청 건물, 의과 대학으로 사용되던 건물, 오페라 극장이 있다. 공적인 목적으로 건설된 이 건축물들은 바로크 건축 양식의 화려함을 살린 동시에 실용적이라는 평을 받는다. 번듯한 건물들과 넓은 광장, 코너에 세워진 황금빛 화려한 게이트와 분수들이 인상적인 곳이다.
광장은 곧바로 뻬삐니에흐 공원(Parc de la Pépinière)으로 연결되는데, 입구부터 십 미터가 훌쩍 넘는 키 큰 나무들이 서있어서 매우 반갑다. 가다 보니 가족들이 함께 탈 수 있는 지붕이 있는 자전거를 대여해주는 곳이 있었다. 십분 정도 기다려서 자전거를 탈 수 있었다.
앞자리에 세명이 앉을 수 있어서, 체구가 작은 아들이 가운데 앉고, 딸과 내가 페달을 밟는 양쪽 자리에 앉았다. 넓게 잘 닦인 공원을 천천히 두 바퀴 정도를 돌았다. 나무도 많고, 넓은 꽃밭도 있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인사도 주고받으며 행복한 시간이었다.
여행 초반에 두려워했던 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여행하는 동안 긴장을 좀 하고 있었나 보다. 특별한 일정 없이 공원에서의 자전거를 탔던 순간이 오래 기억에 남을 정도로 마음이 편안했던 것 같다.
광장 안에 있는 성당(Basilica of Saint Epvre of Nancy)도 빠뜨릴 수 없다. 성당은 아무리 많이 방문해도 질리지가 않는다. 긴 여행 중 오아시스 같은 잠시 욕심을 내려 놓고 숨을 고르는 공간이다. 바깥공기와 확연히 다른 성당 안의 시원한 공기도 좋고, 어둠을 가르는 스테인드 글라스에서 쏟아지는 햇살도 좋다. 고딕 양식 성당의 아치형 천장은 언제보아도 균형잡히고 정교하며 아름답다. 수다쟁이 아들도, 이른 사춘기로 냉소적인 딸도 부드러운 표정으로 함께 침묵하는 5분이 이제는 정말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십분 거리에 있는 숙소의 주소를 네비에 입력하고 찾아가 보자. 주소지 근처에 도착했는데, 찾는 번지수의 집은 보이질 않는다. 주인에게 전화를 거니 바로 앞의 집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언덕길로 올라오라고 한다. 차 한 대가 간신히 갈 수 있는 좁은 언덕길을 용기 내어 올라간다. 중간에 경사가 더 가파르다. 200미터 정도의 길지 않은 길이었지만, 나 같은 소심한 사람에겐 달갑지 않은 난코스의 진입로이다. 무사히 주차를 했다. 주인 부부가 나와서 반겨준다. 귀여운 여자 아이가 수줍게 인사를 한다. 한국에서 가져온 작은 기념품을 아이에게 선물하니 활짝 웃어준다.
주인집을 지나 작은 뜰이 나오고 담쟁이가 벽을 덮은 작은 집이 나온다. 옅은 핑크빛 장미와 주홍색 능소화 넝쿨이 주변을 예쁘게 장식하고 있다. 실내에 들어가자마자 더블 침대가 보이고, 오른쪽 구석진 코너에 아담한 주방이 있다. 나무 계단을 올라가면 아이들의 로망인 다락방이 있다. 여기에는 싱글 침대 두 개가 놓여 있다. 지붕에 뚫린 창문이 있어서 밤에 별을 볼 수도 있다.
원래 계획은 나가서 저녁을 먹으려고 했기에 오는 길에 장을 보지 않았다. 가지고 있는 식료품은 양파 한 개와 감자 두 알과, 쌀이 전부이다. 아껴둔 즉석 미역국과 김을 꺼낸다. 만만한 카레를 만들어서 샤모니에서 만든 얼마 남지 않은 김치와 함께 먹었다. 특별히 알뜰한 성격은 아니지만, 나는 남아 있는 식재료를 긁어모아서 아슬아슬하게 한 끼를 차릴 수 있을 때 묘한 성취감을 느낀다. 곧 파리로 가니까 거기에서 한국 식재료를 구입할 수 있을 것이다.
저녁 식사마저 특별한 것 없이 있는 것을 가지고 해결했다. 그래도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편안한 날이었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 기대를 내려놓는다는 것이 이런 느낌이겠구나 싶다. 아이들과 일기를 쓰고 다락방에 올라가 모두 함께 창밖을 내다본다. 깜깜한 창밖으로 별이 보인다. 아이들과 뒹굴거리는 저녁시간이 참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