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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들레 Feb 23. 2022

코로나 속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알베르 카뮈 <페스트>에서 지혜를 얻다.

   

코로나라는 전염병 속에서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나? 

위기 속에서 나는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     


알베르 카뮈 『페스트』 김화영 민음사   


알제리 출생인 알베르 카뮈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7년 7년 준비한 『페스트』 출간한다. ‘한 가지 감옥살이’(아내 프랑신과의 2년간 이별)를 생이별. 질병. 2차 대전의 고통의 존재를 ‘페스트’라는 존재하지 않는 사실에 비유하며 자신을 의사 ‘리유’에게 투영하며 서술자로 등장한다. 지금과 같은 코로나 상황에 어떤 이야기를 담아낼지 호기심이 인다.



     



소설 배경인 오랑시는 카뮈의 질병·이별이 담긴 장소다. 오랑시는 삭막한 듯 평범한 도시다. 194* 4월 16일 리유가 한 마리 죽은 쥐를 발견하며 시작된다.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쥐들이 늘어나고. 아픈 리유 아내는 요양을 떠나 부부는 생이별한다.  예심판사 오통씨. 신문기자 레몽 랑베르. 여행자 장 타루. 늙은 해수병 환자를 진료하러 가며 등장인물들이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죽은 쥐 8,000마리 증가로 불안이 절정에 이른다. 리유 병원 수위 미셸이 목. 겨드랑이·사타구니 통증이 시작된다. 파늘루 신부. 시청 서기 조제프 그랑. 자살미수로 끝난 코타르가 등장한다. 결국 이틀 후 수위가 사망하며 페스트의 시작을 암시한다. 리유 외에 사소한 기록자 ‘장 타루’의 기록이 이어진다. 시청 서기 그랑은 외국어 공부. 글쓰기 등을 취미로 삼는 예술인으로 카뮈가 높은 비중을 두는 인물이다. 현실의 괴로움을 잊을 수 있는 건 영혼을 힐링할 수 있는 예술적인 활동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 같다.   

   

그런 경우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종류의 인간이다.(64쪽)

      


사망자 수가 급증하며 페스트가 선포되고. 도시는 폐쇄된다. 본격적인 감옥살이가 시작된다. 생이별한 이들과 간단한 편지 왕래도 힘들어진다. 죽음에 대한 고통·두려움이 강해진다. 이제자신. 그리움과의 싸움만이 남는다.  일시적인 인간의 본능은 희망을 품는다. 코로나가 급속이 확산되고 대구지역 폐쇄 때 생각이 난다. 그래도 우리는 곧 끝날 거라는 희망이 있었다.       


길거리·카페를 찾는 이들로 오랑시는 휴가철을 연상시킨다. 그랑의 과거 아내 ‘잔’에 대한 회상. 프랑스에 있는 아내를 향해 탈출을 시도하는 기자 랑베르. 파늘루 신부는 ‘페스트는 인간의 죄다’라는 설교를 한다. 이로 인해 공포에 떠는 사람과 대항하는 사람들이 생긴다. 그랑의 글쓰기에 대한 몰입과 고뇌는 카뮈의 글쓰기 고뇌를 투영한다.     


 6월 뜨거운 더위로 페스트는 급상승한다. 무감각. 침묵이 도는 거리, 통제. 절망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조용히 살아가는 사람들. 사치에 빠진 사람들. 빈부격차가 두드러진다.  장 타루는 무능력한 당국을 비판하며 직접 보건대 조직 계획을 세운다. ‘고통스럽게 죽은 자들 앞에서는 신 타령만 할 수 없다.’는 장 타루는 행동파다.  ‘윤리관’‘사명감’으로 페스트와 싸우는 리유. 보건대 편성은 사람들의 연대성을 강화시킨다. 파스텔 의사는 혈청 완성이 막바지다. 그랑은 보건대 서기를 자원한다. 코로나 3년째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사치는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사명감이 투철하지도 않다.  리유와 장 타루의 실천력. 사명감에 도덕적 양심이 꿈틀거린다.    

 

리유·타루는 그랑의 예술적 글쓰기에 동참하며 휴식을 얻는다. 절망 속에서도 결국은 정신적으로 숭고한 예술의 힘은 빛난다. 


볼 줄 아는 것은 예술가뿐이지요(182쪽)

페스트 속에서 암거래로 이익을 보는 코타르는 랑베르의 탈출을 돕는다. 하지만 탈출 시도는 원점이 된다. 랑베르는 리유에게 영웅주의라 비판하기도 한다. 여기에 리유는 “내 경우로 말하면. 그것은 자기가 맡은 직분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216쪽)   카뮈가 전하고 싶은 ‘연대. 사명감’ 지금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버틸 힘을 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  랑베르는 탈출하기 몇 시간 전 결국 오랑에 남겠다고 한다.  랑베르도 보건대 봉사에 동참한다. 이방인이었지만 결국은 랑베르도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기에 연대감을 배신할 수는 없던 것이다. 코로나 속에서 나는 이익을 추구하며 살고 있나? 아니면 연대감을 추구하며 살고 있나? 


혼자만 행복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요.(272쪽)


8월 중순 페스트가 모든 것을 뒤덮는다. 공통되는 생이별 귀양살이. 폭동. 탈출. 무법 도시가 되어간다.

도시의 밤을 지하 묘지로 비유하고. 장례식은 폐지되고 전쟁을 연상케 하는 시체 매장이 신속. 간소. 비참하게 묘사된다. 가족의 죽음을 서명만 하면 매장의 끝인 것이 개와 구분될 정도다. 관이 부족하고. 구덩이로 시체가 쌓인다. 실업자는 보수를 받고 무덤을 파고 또 전염되어 죽어간다. 결국 페스트는 낙담. 체념. 적응. 습관까지 이른다. 과거 범죄자의 윤곽을 드러내는 코타르는 페스트를 즐긴다. 너무나 세세한 표현들이 끔찍할 정도다. 코로나 초반 시체 처리 과정.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확진자. 사망자의 공포가 되살아난다. 그 공포 속에서도 빈부격차는 더욱 심해져가고 있다.  

          

10월 하순. 카스텔 혈청 시험이 마지막 희망이다. 오통 판사 아들이 페스트에 걸려 혈청을 실험한다. 

모든 이들이 보는 앞에서 죄 없는 어린아이가 사지를 비틀며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이한다. 리유는 절망하고. 파늘루 신부는 신에 대한 고뇌를 시작하며. 두 번째 설교를 한다. “여러분”이 ”우리들”로 바뀐다. 결국 페스트에 싸워야 하고. 종교인은 그래도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한다는 자신의 다짐을 보여준다. 파늘루 신부는 페스트가 아니었음에도 신에게 자신을 맡기며 죽어간다. 서둘러 코로나 백신이 나오고. 우리는 실험 대상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우리는 거대한 재앙 앞에서 연대라는 큰 힘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11월 죽음에 무관심해진다. 카스텔 혈청이 효과를 드러내지만. 페스트는 다른 변이를 보인다. 지친 어느 날 타루는 리유에게 자신의 과거를 고백한다. 카뮈 <이방인> 뫼르소에게 사형선고를 했던 검사가 장 타루의 아버지라는 연상을 하게 된다. 그 뒤 장타루는 사형선고 반대에 인생을 걸고. 전쟁. 욕심. 이기심을 담은 페스트에 맞서 싸운다. 리유와 우정을 다지며 해수욕을 하며 극 중 절망 속에 환기를 시켜준다.      


12월. 페스트가 후퇴하기 시작한다. 1월 페스트가 임무를 마치고 후퇴한다. 시민들은 조심성 있게 희망을 품기 시작한다. 하지만 승리했다는 순간 온통 판사는 아들 곁으로 간다. 도시는 회복되기 시작한다. 페스트를 겪는 사람과 이겨낸 사람은 희비가 교차한다. 코타르를 찾아온 형사를 피하고. 장 타루는 마지막 페스트의 침입으로 리유와 리유 어머니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으며 사망하게 된다. 타루의 죽음으로 리유는 평화가 아닌 패배감을 느낀다.    


2월 드디어 도시가 개방된다. 생이별했던 이들은 재회의 날을 맞이한다. 재회는 죽은 이들이 있어 이별의 슬픔이 절정에 달하기도 한다. 인간은 ‘사랑’ ‘애정’이 전부다. 코타르는 총기 난사로 결국 잡혀가고. 랑베르는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고. 그랑은 자신의 삶을 이어간다. 죽은 이들은 잊히고 인생은 또 흘러간다.

페스트가 끝난 순간 빈부격차를 떠나 누구나 평등하게 기쁨을 만끽할 수 있지만. 그 순간은 금세 지나가버린다.     

죽음 앞에서도 사실상 실현되지 못했던 평등이. 해방의 기쁨 속에서
적어도 몇 시간 동안은 실현되고 있었다.(386쪽)   


언젠가 전염병이나 전쟁이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암시로 리유의 서술은 끝난다. 페스트를 통해 전쟁. 전염병. 인간의 이기심. 욕심에 대해 생각을 해보게 된다. 지금처럼 코로나에서 대처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등장인물의 삶과 함께 연결해보니 70년 전 오랑 도시의 모습이 지금과 별반 다른 것이 없다. 과학 문명에 감사하고. 의료발전에 감사한 마음도 커진다. 전염병 코로나는 인간의 이기심으로 생긴 결과물이다. 등장인물들은 서서히 연대성을 발휘해 보건대 활동에 참여하게 된다. 보건대라는 연대는 내 행동을 돌아보게 된다.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으며, 그 균은 수십 년간 가구나 옷가지들 속에서 잠자고 있을 수 있고. 방이나 지하실이나 트렁크나 손수건이나 낡은 서류 같은 것들 속에서 꾸준히 살아남아 있다가 아마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또다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402쪽) 



     


시공간을 초월해 페스트는 존재한다. 페스트라는 극한 상황에서 우리의 이기심이 어떻게 발현될까? 페스트가 끝나도 죽은 이들에 대한 애도와 다시 찾아올 전염병. 전쟁에 대해 우리는 겸손하게 조용히 삶을 살아가야 한다.  코로나도 언젠가 완전히 후퇴하는 날이 올 것이다. 코로나 상황에서 나는 내 이기심만 생각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연대성을 실천하며 살 것인가? 극한의 공포 속에서도 예술 속으로 정신을 쏟을 수 있는 감수성 가득한 영혼은 공감력을 키워낸다. 그것이 연대성으로 이어지며. 전쟁. 이기심. 전염병을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나는 지금 지식뿐만 아니라 감수성을 키우기 위해 고전을 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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