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이야기들이 아이들에게서 들리면 여름이 오고 있다는 뜻이다. 나의 1년은 제주 여행 전과 후로 나뉜다. 매해 7월 제주에 오기 전까지는 작년 제주 사진이나 기억을 떠올리며 일상을 버틸 때가 많고 다녀와서는 올 해 여행을 꺼내 남은 계절을 보낸다. 우리 가족은 두 달에 한 번 정도 대천 시댁 방문과 1년에 한 번 고향에 가서 부모님 산소를 보는 것 말고는 거의 여행을 다니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가. 아이들과 나는 여름이 되어 제주에 갈 날만한 기다린다. 그리고 제주 공항에 내린 순간부터 서울의 일들은 셔터가 내려가고 나의 눈길과 마음은 제주 on 모드로 전환. 지난 1년 동안 세상일(직장, 육아, 살림 등)에 지치고 해진 마음이 순식간에 압축되며 공간이 생기고, 그 여백에 눈부시게 푸르는 제주 풍경만 들어차게 된다.
물론 처음부터 그렇게 느낀 것은 아니었다. 2020년도 여름, 코로나가 막 시작되면서 조심스레 제주도에 왔을 때 함덕에는 잠시 머물고 세화에 좀더 오래 있었다. 바다가 바로 보이는 숙소 2층. 그곳은 천국이었다. 굳이 나가지 않아도 푸른 바다가 보이고, 아침에 파도소리를 들으며 일어나고 조식까지 먹을 수 있는 곳에서 내가 누릴 수 있는 사치의 최고를 맛보았다. 누군가로부터 귀한 대접을 받는 기분. 1년에 며칠만이라도 나에게 그런 선물을 주고 싶었다. 대신 외식을 하지 않고 밥도 해 먹고 간단하게 먹으며 돈을 아끼면 되지 않을까. 고생한 나에게 이 정도의 선물을 주겠다는 나의 의지는 확고해졌고 4년째 실천 중이다.
이듬해인 21년도 함덕에 먼저 가지 않고 세화로 바로 왔다. 공항에서 한 시간 넘게 달려 어둑해진 세화에 도착하는 택시에서 밖을 보다 갑자기 ‘아 좋다’하는 탄성이 흘러 나왔다. 바로 엊그제 내가 걸었던 것만 같은 길. 익숙한 파도 소리. 여전히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는 가게들. 낯선 곳에서 오는 긴장감이 아니라 다정하고 익숙한 곳에서 느끼는 편안함이 마음에 꽉 찼다.
무슨 마음이었을까. 그 날 저녁 잠을 자기 전 그 감정의 실체를 쫓다 알게 되었다. 그건 내가 엄마가 살아계실 때마다 가던 나의 섬, 고향집의 느낌이었다는 것을. 찌르르 벌레들이 울고, 물기를 품은 바람이 나뭇잎을 스쳐가며 나의 이마를 건드리는 세화의 여름밤이 나의 어릴적 고향 여름밤을 닮았다는 것을.
더 이상 가지 않는 나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이 곳에서 풀기로 했다. 바다에서, 산책길에서, 여러 가게에서 그리움을 행복함으로 하나씩 바꾼다. 제주에 오면 서울 생각은 자동으로 로그아웃. 그리고 지금 한 번 뿐인 순간을 즐기기 위해 순간에 집중하며 제주를 마음에 담는다.
소소한 행복 저장
<기록하기로 했습니다>에서 작가 김신지는 행복이라고 부르기에는 어쩐지 조그맣게 여겨지는 사소한 순간을 가르키는 말로 ‘행복의 ㅎ’이라는 표현을 썼다. 흔히 말하는 소확행을 일컫는 것일텐데 나는 소확행보다는 ‘행복의 ㅎ’이 우리의 제주 여행과는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내가 제주에서 매해 줍는 '행복의 ㅎ'은 이런 것이다. 아침에 눈뜰 때 들리는 파도 소리. 숙소 창밖으로 파랗게 펼쳐진 세화 바다. 숙소 사장님이 매일 차려주는 맛있는 조식. 점심으로 사먹는 톳 김밥. 저녁에 들리는 하나로 마트. 그 곳에서 산 신선한 한치회 한 접시와 우도 땅콩 막걸리. 세화바다 모래에서 캔 모시조개. 함덕에서 늘 먹던 맛있는 마늘빵. 전복 김밥. 아주 작은 것들이지만 제주도 와서 반드시 저장하고 가는 것들이다. 물론 새롭게 추가되는 것들도 있다. 혼자 운전하다 본 해변의 노을. 새롭게 발견한 커피와 뷰 맛집. 바다가 보이는 가게에서 먹는 해물라면, 성산일출봉과 앞 바다, 그리고 성산일출봉이 보이는 새로 오픈한 커피숍과 아이스아메리카노. 이 정도면 한 해 살기 충분하다.
<제주에서 저장하는 '행복의 ㅎ'. 이 곳에서 행복은 다른게 아니라 결국 좋은 순간들을 잘 기억해 두는 일이 아닐까 생각되어 매해 나는 부지런히 눈에 담고 핸드폰 사진으로 남긴다.
제주가 아닌 다른 곳에서는 겪거나 느끼지 못했을 순간을 사랑하는 아이들과 같이 바라보고 느낄 수 있어서 좋다. 아이들과 서울에서 바로 꺼내어 이야기 해도 ‘아, 그거!’ 하고 바로 추억이 재생될 수 있어 좋다. 내가 어릴 적 나의 고향에서 그랬던 것처럼 따사로운 햇빛, 하늘, 바람, 파도소리, 매미 소리들이 제주에서 우리 아이들에게도 잘 저장되면 좋겠다.
제주에서 저장된 이 소소한 행복들이 아이들이 살아가면서 필요할 대답이 되길 .. 인터넷에서 찾는 답이 아니라 스스로 단단한 목소리로 말할 수 있는 아이들만의 대답이 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