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관련된 에피소드들을 남들에게 공유할 때면, 다들 공통적으로 보이는 리액션이 있다.
“대표님네 집은 시트콤 준비해요? 무슨 집안이 이렇게 웃겨요.”
“온 집안이 개그맨 시험 준비해요?”
“대표님네 집 얘기로 글 한번 써봐요. 대박 날 것 같아요.”
그런가? 흠.
이런 얘기들을 하도 많이 듣다 보니, 소소한 이야기들이긴 하지만 나는 우리 집 에피소드들을 하나씩 공유해볼까 한다. 지금까지는 우리 집이 그냥 무난한고 평범한 가족인 줄 알았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약간 콩가루 느낌인 것 같기도 하고……
아무쪼록 조금 (아주 조금) 별난 것 같긴 하다.
객관적인 눈으로 보았을 때 (엄마는 끝까지 아니라고 우기지만)
우리 집에서 가장 무던하고 평범한 성격의 사람을 꼽자면 나는 아빠를 뽑겠다.
아빠는 (젊은 시절엔 꽤나 속 썩였다고는 하지만)
지금은 (지금이 중요하지, 젊을 때가 뭐가 중요한가) 엄마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는 가정적인 남자다.
아빠만큼 집에 헌신하는 남자가 있으면, 비혼 주의고 뭐고 당장 그 남자를 납치해서 혼인신고할 수 있다.
우리 아빠는 뉴질랜드에 살 때도, 지금에도 소문난 딸바보다. 오죽했으면 뉴질랜드에서 살 때, "00 이는 결혼도 못하겠어~ 아빠가 부록이어서" 라던가, "나중에 00 이가 남자 친구랑 배가 끊겨서 하룻밤 자고 와야 한다고 하면 아빠는 딸내미 마음도 모르고 온 바다를 헤엄쳐서 데리러 가겠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보이진 않지만) 우리 아빠는 대기업 출신에 그 시절 엄청난 엘리트였는데 (무려 전교 1등 출신이다). 지금부터 40여 년 전, 어느 한 여인네의 눈에 (불행히도) 띄게 되어 7년 연애 후 결혼했다. 그 여인네는 우리 엄마다. 지금 와서 얘기지만 엄마는 태어나서 아빠만큼 키 큰 남자를 본 적이 없었다고, 딱 그 이유 하나로 아빠를 대학시절 내내 졸졸 좇아 다녔다고 했다. 다른 이유는 전혀 없단다. '키'하나 보고 사랑에 빠졌단다.
엄마는 내가 봐도 정말 불도저 같은 스타일이다. 사람 참 독특하다.
오죽하면 엄마의 어릴 적 유행어가, “나 머리에 빨간 꽃 달게 하지 마”였다. 빨간 꽃=미친다 라는 뜻이다. 엄마가 저 멘트를 치면 온 집안이 조용해지곤 했다. 정말 머리에 '꽃'을 달면 온 집안이 난리 난다. 집을 나간다고 폭탄선언을 하질 않나, 자유를 찾아야 한다고 단식투쟁을 벌이질 않나... 지금도 엄마가 눈을 치켜들면 온 집안이 깨갱이다. 엄마는 우리 집 실세다. 내가 봐도 58세 여사님들 가운데 탁월한 미모를 자랑한다. 문제는 자기가 예쁘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각종 동창회, 모임 자리 등에 빠지지 않는다. 일명, “00동 미스 진”이다.
나는 그냥 남들에 비해서 아주 조금(사실 조금 많이) 예민한 성격의 사람이다. 15년 가까이를 뉴질랜드에서 생활을 했는데... 정말이지 내가 봐도 21세기 대표 유교 걸이다. 꼰대다. 사업을 어린 나이에 시작하다 보니 그렇다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하고 싶다. 내가 객관적으로 봐도 나는 까다롭기도 하고 변덕도 심하다. 스물여덟씩이나 되었는데 온 방안에 디즈니 베이비돌로 도배가 되어있다. 디즈니 영화가 개봉할 때면 온 가족이 함께 영화관 방문을 해야 하는 집안의 철칙을 세운 사람이다. 나는 (객관적으로) 우리 집에서 가장 착한 사람이라고 자부한다.
남동생은 아직 뉴질랜드에 있다.
이놈이 정말 별난 게, 세상만사 사고란 사고는 다 쳐봤다 (다행히 아직까지 조카를 만들어온 적은 없다.
그것 빼고는 다 해봤다.) 시험 날짜를 잊어버리고 시험을 못 치질 않나, 힙합에 빠져서 학교에서 교복 바지를
엉덩이에 걸쳐 입는다고 정학을 당하질 않나... 아무튼 별나다. 이놈은 외국에서 태어나서 그런가 사상이 남다르다. 어떨 때는 천상 외국인 마인드였다가, 어떨 때는 메이드 인 코리아 꼰대도 이런 꼰대가 없다. 정말이지 왔다 갔다 한다. 화장실에서 볼일 보다가 비행기 놓쳤다고 전화해서 울면서 비행기 다시 끊어달라는 23세는 아마 내 남동생밖에 없을 거라고 자부한다. 그 정도로 돌+아이다.
(에피소드들을 풀기에 앞서서)
우리 집은 1997년 뉴질랜드 웰링턴으로 이민을 갔다.
당시 나는 만4세였다.
우리는 이민 1.5세대로, 뉴질랜드로 이민을 처음 갔을 당시에 한국인은커녕, 아시아인도 많이 없었다.
나는 2010년, 엄마와 아빠는 2016년, 남동생은 2017년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남동생은 2019년 학업을 위해 (라고 쓰고, 내가 도저히 감당이 안되서라고 읽는다) 뉴질랜드로 귀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