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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선 Oct 01. 2020

한가윗날, 나만의 소소한 의식(仪式)

나 홀로 "토지"축제

  '1897년의 한가위.

  까치들이 울타린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 인사를 하기도 전에, 무색 옷에 댕기 꼬리를 늘인 아이들은 송편을 입에 물고 마을길을 쏘다니며 기뻐서 날뛴다. 어른들은 해가 중천에서 좀 기울어질 무렵이래야, 차례를 치러야 했고 성묘를 해야 했고 이웃끼리 음식을 나누다 보면 한나절은 넘는다. 이때부터 타작마당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들뜨기 시작하고--- 남정네 노인들보다 아낙들의 채비는 아무래도 더디어지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식구들 시중에 음식 간수를 끝내어도 제 자신의 치장이 남아 있었으니까. 이 바람에 고개가 무거운 벼이삭이 황금빛 물결을 이루는 들판에서는, 마음 놓은 새떼들이 모여들어 풍성한 향연을 벌인다.'

  '팔월 한가위는 투명하고 삽삽한 한산 세모시 같은 비애는 아닐는지. 태고 적부터 이미 죽음의 그림자요, 어둠의 강을 건너는 달에 연유된 축제가 과연 풍요의 상징이라 할 수 있을는지. 서늘한 달이 산마루에 걸리면 자잔한 나뭇가지들이 얼기설기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소복단장한 청상의 과부는 밤길을 홀로 가는데 - 팔월 한가위는 한산 세모시 같은 처량한 삶의 막바지, 체념을 묵시(默示)하는 축제가 아닐는지, 우주 만물 그중에서도 가난한 영혼들에게는.'


  내가 사랑하는 대하소설 "토지"의 서문과 평사리의 한가위를  묘사한 문장이다. 일제 강점기 시대 민초들의 슬픔과 서글픔, 죽음의 그림자가 소설 초반부터 낮게 드리워진다.

  나는 "토지" 마니아로 해마다 한가위 날이면 이  문장을 불교신자들이 불경 경문을 외우듯이 중얼중얼하며 되새김질한다. 2003년에 "토지"를 접했으니 만 17년, 18년째로 명절날의 경건한 의식처럼 조용히 읊조리다 보니 머리 안에 각인이 돼버려 줄줄 자동 재생한다. 살아가는 앞날에나만의 이 소소한 의식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진정한 팬심으로 지극정성으로 "토지" 사랑을 표현하는 나만의 의식이다. 요즘 많이들 얘기하는 찐찐 찐 팬심이란 이런 건가보다. 학문을 하는 사람도 학자도 아닌 나는 "토지"와 저작자인 박경리 선생님에게 홀릭해 열독 하며 심취해서 살아간다. 이쯤이면 심한 중독자인데 건전한 중독자,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 주는 일 없이 혼자만 조용히 종이책이랑 씨름하는 거니까 눈살 찌푸릴 일은 없다.

  홀릭이 없는 삶은 너무 밋밋하고 심심하다고 생각한다.

         솔출판사 본 16권(4년 전 구입 소장)


  대하소설 "토지"는 장장 25년에 걸쳐 써 내려간 21권의 대작이다. 2003년 봄, 내가 지인의 "토지" (나남출판) 21권을  빌려 45일 만에 완독 했던 기억이 오늘 한가위 중추절에 새록새록 떠오른다. 처음으로 접했을 때 그 벅찬 감동과 기분이 잊히지가 않는다. 정작 책의 주인은 지금까지도 완독 못한 걸로 알고 있다. 그 지인은 소설 속 평사리 사람들이 구사하는 사투리가 도통 알아볼 수가 없어 곤혹스럽다고 여러 번 토로했다.  마치 내가 대하소설 "태백산맥"(10권 조정래 작)의 사투리가 어려워 6개월 만에 완독 한 것처럼 같은 맥락이다. 찬찬히 들여다보면 알아볼 수는 있지만 읽는 속도를 내지 못해 긴 시간을 소요하기 마련이다.

  소설은 1897년 음력 8월 15일 한가윗날로 시작해서 1945년 양력 8월 15일 광복절로 막을 내린다. 근 50년의 한국 근대사를 배경으로 등장하는 수백 명의 인물들과 한국, 일본, 중국, 로씨야 등의 광활한 주무대, 방대한 스케일에 정신이 아찔하고 아득하고 짜릿했다. 우리 민족의 고난의 역사과정을 애정을 듬뿍 담아 유려한 필치로 소설 속에 등장하는 700여 명의 개성을 제각각으로 살려내며 한국문학사에서 길이 남길 명작 수작을 펼쳐냈다. 25년간 병마와 고독과 싸우며 이겨낸 결과물이었다. 나는 45일간을 매일 잠도 서너 시간만 자며 자나 깨나 흠뻑 빠져 살았었다. 아름답고 수려한 한글의 향연 속에 퐁당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이 행복하고 짜릿했다. 극 중 평사리 사람들이 구사하는 사투리는 향수(郷愁)를 자극한다. 유년 시대 살았던 시골마을 어른들의 말투와 똑같아서 읽어내려가다 보면 어느 순간 크게 소리 내어 읽기도 한다. 흥미롭다.

  한 번만 읽음으아쉬움이 많았고 자주 뇌리를 스치니 몇 년 전에 16권짜리 판본을 구입 소장했다. 박경리 선생님이 20세기 40년대 후반 헌 책방경영했다던 유서 깊은 인천 배다리 책방거리, 그중 아직도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아벨서점에서 구입했다.

  수시로  짬만 나면 뒤적거린다. 옆에 끼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사랑한다. 곱씹어 읽으면 읽을수록 묘미는 살아난다. 엔도르핀이 뿜 뿜 하니 행복해진다. 명작은 읽는 나이 때에 따라 느낌이 달라진다. 어릴 적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연륜이 쌓이며 보이는 부분들이 다. 나는 "토지"에서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편향적이지 않은 인물 묘사법이 너무 매력적이라 생각한다. 박경리 선생님의 위대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절대적인 선과 악이 아니고 최대한 인간의 본성에 접근하는 작가정신 말이다. 인간에 대한 넘치는 사랑과 연민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재작년 한가위의 기억으로 생각한다. 동생네랑 오붓하게 모여 명절 분위기 무르익어 갈 때 나와 동생은 그 많은 인문학 화제의 안주 속에서 대하소설 부분에서 맞붙었다. 동생은 대하소설 작가 중 조정래 님이 최고라고 하고 나는 박경리 님이 최고라며 한치의 양보도 없이 빡빡 우기며 팽팽했다. 그냥 현대문학사의 양대산맥인걸 우리네 인들이 첫째니 둘째니 하며 쓸데없는 경쟁을 하는 것이다. 백사람이면 백사람의 견해가 나온다. 저마다의 선호도가 있는 법. 사실 동생은 종이책은 못 봤고 영화 드라마만 보고 깊이를 논하는 것이었다. 남성여성심미안이나 견해 차이일 수도 있는 건대.  나 지금이나 내 마음의 대하소설 베스트원은 "토지"니까 그야말로 일편단심이다.

   통영 생가터, 하동 악양의 평사리 마을, 진주 촉석루, 원주 등 배경지는 다 돌아봤다. 나름의 성지순례를 한 셈이다. 코로나 끝나고 자유로워지면 또 한 번씩 돌아보고 싶다.

  올해는 코로나 19로 인해 희한한 추석 풍경이 될 것 같다. 귀성을 자제하고 비대면 화상만남을 하자는 목소리에 산소 벌초도 "대행"이 권고되고 온라인 성묘라는 개념도 대두하다니 전무후무한 추석 풍경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유난히도 힘든 올 한 해지만 한가위인 오늘만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처럼  친지 가족들과 비대면 명절일지라도 화상으로라도 즐겁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따뜻한 명절이 되기를 기원하며. 이태백이 놀던 밝은 달에 소원 빌며 새 희망을 품어 보아요.

  먼 훗날 2020년의 한가위는 아주 스페셜한 명절로 기록에 남을 것이다. '2020년의 한가위, 코로나로 고역을 치르던......'하고 말이다. 역사는 흘러가고 있다.

  코로나 19  우울한 시기여도 한가위 추석 명절에 풍악은 울려야 제격이다. 엊저녁 "2020년 한가위 대기획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의 티브이 콘서트로 큰 위안과 위로를 받았다. 레전드는 역시 레전드였다. 노장은 죽지 않았다.

  코로나 19 시기를 관통하고 있는  힘든 시기, 수많은 지쳐있는 영혼들에게는 큰 힐링이 되었을 것이다.

내 멋대로  "토지" 축제에 모셔온 가황 나훈아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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