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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선 Oct 06. 2020

아! 테스 형

전설은 전설이었다

  바람이 차갑게 소슬해지며 가을이 깊어간다. 빨갛게 물들어가는 단풍들이 더 많아지고 바닥에 떨어져 뒹구는 낙엽들도 즐비하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것이 걷기 운동하기 딱 좋은 날씨다. 쾌적하다. 매일 오후 4시쯤에 걷기 시작하는 5킬로 구간의 마지막 코스에 도달하면 흔들 벤치가 하나 있다. 나는 '참새가 방앗간을 두고 그냥 지나갈 순 없지' 식으로 그 벤치를 그저 지나치지는 못하고 늘 한참씩 앉아서 흔들흔들하고야 만다. 아이들처럼 신나게. 한 시간 정도 걷는 내내 생각했던 것들이 그 흔들의자에 앉으면 주제가 서고 명확해진다. 나는 그 흔들 벤치를 마법의 의자라고 한다. SF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신기가 있는 물품처럼 말이다. 신나게 흔들거리며 족집게처럼 집어주는 생각들을 정리하고 자리를 툭툭 치고 일어나곤 한다.

              마법의 흔들 벤치 (사진: 김경선)

  오늘도 예전처럼 흔들 벤치에 앉았다. 주변에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으니 큰 폭으로 흔들거린다. 워낙 한산한 운동코스인지라. 흙과 모래가 뒤섞인 비포장길이 시골길 같아 걸을 때 자박자박 소리가 정겹고 은근하게 향수를 자극하는 산책로가 맘에 쏙든다. 거의 동네 아파트 놀이터의 아이들이 노는 그네 수준으로 훠이훠이 쌩쌩 타며 해맑은 동심으로 돌아간다. 맞은편 풀숲에  백일홍과 코스모스가 질서 없이 뒤섞여 바람에 하늘하늘 춤을 춘다. 역시 가을꽃들이 빛깔도 곱고 진하게 화사하다. 깔끔하게 피어있는 구절초, 저 멀리 먹장구름과 파란 하늘을 동시에 이고 하얀 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명암이중천(明暗两重天)을 연출하고 있는 하늘의 모습이다. 복잡하고 착잡하게 돌아가는 현실상과 맞닿은 듯하다.

  '코스모스 피어있는...'노래 유발하는

              깔끔하게 피어있는 구절초

           다리위의 이중천(两重天)


   문득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이 디리링디리링 바쁘게 울린다.  보통 때는 운동 할 적에 두고 다녔는데 오늘은 마트 들렀다 가려고 들고 나왔다. 펼쳐보니 동문 톡방에 올라온 동영상 문자들이 보인다. 연 며칠 나훈아 님 소식으로 톡방이 뜨겁다. 이 식지 않는 열기 '우야믄 좋노'.

  '나 홀로 기고만장 만족하며 독선적인'듯한


  오늘 한 시간 걷기에 줄곧 나훈아 노래 흥얼거리며 타임머신 타고 30년 전으로 돌아갔다가 방금 정신줄 붙잡고 돌아와 있는 중이었는데. 30년이 넘는 광팬으로 뭐라도 쓰고 싶어 걷는 내내 머리 안에서 구상하고 있었는데.


  내가 나훈아 님 노래를 처음 접한 것은 1980년대. 베이징에서 학교 다닐 적에 캠퍼스에 돌아다니는 한국 노래 카세트테이프들이 있었는데 주로 나훈아, 조용필, 이미자, 조용필 등 가수들의 노래들이었다. 80년대 개혁개방 이전인 폐쇄적인 중국의 분위기에서 한국 가수 노래를 듣는다는 건 그야말로 황량한 사막 속에서 발견된 오아시스처럼 신선한 청량제였다. 처음 들었을 때의 그 충격은 지금도 잊히질 않는다. 어쩌면 그런 창법으로 노래를 부를 수가 있고 듣는 사람 황홀하게 만들 수가 있는 건지. 딱딱한 혁명가요만 힘차게 열창하던 우리에게는 맛깔스러운 음색과 창법만으로도 신세계를 펼쳐준 셈이다. 노래 듣기 좋아하는 나는 짬만 나면 듣는다. 듣고 부르고 또 부른다. "가지 마오" "강촌에 살고 싶네" "애정이 꽃 피던 시절" "고향역" "물레방아 도는데" "청춘을 돌려다오" "울긴 왜 울어" "18세 순이" 등등 수많은 곡들이 그때 들었던 곡들이다. 방학 때면 테이프들을 녹음 복제해서 고향에 계신 부모님들에게 가져다 드리면 그 노래들을 들으시며 신기해하시고 행복해하시던 부모님 얼굴,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내 나이 풋풋한 20대 초반의 학생 시절이다.

  199812월 세종문화회관에서 콘서트가 열렸다. 콘서트 방영분을 연말에 문화방송에서 티브이로 방송했던지 서울 바이어가 정성스레 비디오테이프로 복제해서 선물 준 기억이 생각난다. 음질효과로 봐서 티브이 방송분은 확실하다. 내가 나훈아 님 광팬인걸 아시니까 고맙게 마음을 써 주신 것이다. 테이프를 보고 또 보고 주변의 친구, 친지들 빌려가며 몇 바퀴를 돌았는지도 모른다. 마지막에는 테이프가 너무 듣다 못해 늘어져서 귀신 나올것 같이 노래가 맛이 가버렸다. 한 시절 내 가족에게 무한한 행복과 즐거움을 선사해준 추억의 비디오 테이프였다. 아날로그 감성의 낭만과 추억이 충만하다.

  올해 초 티브이조선의 "내일은 미스터 트롯"경연에 참가한 트롯가수 중에 이찬원이라는 젊은 가수가 유난히 나훈아 님의 노래를 맛깔나게 잘 소화하는 걸 보며 엄마 팬심 폭발해 버렸다. 나훈아 님을 이어갈 대형가수의 탄생이라고 나는 사심 담아 기대해본다. 집콕을 많이 하는 시기에 경연 프로그램에 푹 빠져 한편으론 열심히 응원하고 한편으론 유튜브에서 나훈아 님 콘서트 동영상들을 다시 보기 하며 흥의 도가니에 빠져 살며 순간순간 현실의 짓눌림을 이겨냈다.

  올해 추석 전에 뉴스를 통해 "2020 한가위 대기획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소식을 접했다. 폴짝 뛰며 흥분하는 엄마를 충격적인 눈으로 쳐다보는 아들의 눈치도 전혀 개의치 않으며. 기다리고 기다리던 D-데이, 30일 저녁 일찍 해 먹고 시작 전부터 소파에 자리 잡고 앉았다.  드디막이 열렸다. 심장이 벌렁벌렁 뛴다. 황홀하다. 감탄이 절로 튀어나온다. 가 하도나 오두방정을 떨어 싸서 이찬원 님과 동갑인 아들도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지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본다며 슬쩍 옆에 와 앉았다. 두 시간 반 동안의 열창 속에 신곡을 빼곤 신나게 다 따라 부르는 엄마를 향해 들은 연신 엄지 척을 한다. 뜨악하며 충격이라는 표정을 거듭 남발한다. 나훈아 님의 세련된 노래와 무대 장악력, 무대 표현력에 극찬을 아끼지 않는 아들을 보며 나는 어깨가 으쓱 올라가며 찐 팬심이 자랑스럽고 너무 흐뭇했다. 방송 끝난 후 시원한 맥주 한잔씩 기울이며 시청소감마저 훈훈하다. 요즘 티브이만 켜면 쏟아져 나오는 트로트, 한 시대를 풍미했던 레전드들의 출연을 보며 예전만 못한 노래 실력과 가라앉은 성대에 답답함을 참을 수 없었다. 70대의 나훈아 님도 목소리가 가라앉았을까 봐 우려스럽고 걱정이 되었다. 뚜껑을 열어보니 역시는 역시였다. 간드러지고 깔끔한 음색 변함없고 관중을 들었다 놨다 하는 카리스마 여전하고 베이징 친구의 말을 인용하면 "존경스럽다 못해 경건한 마음이 생기게 되더라"는. 티브이 시청에도 설레고 들떠고 행복한 마음 여전하니 이 찐팬심 영원할 거 같다. 성대 보호를 잘했다는 건 엄격하게 자율적인 생활을 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 무대를 위해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며 온 심혈을 쏟아부었다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느낄 수가 있었다. 가황(歌皇) 다운 진지한 자세에 완벽한 무대였다. 한국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거대한 산 이자 진정한 아티스트임을 또 한번 강력하게 입증을 해 줬다. 중간중간에 리던 센스 넘치고 지혜로운 멘트들 또한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 길게 여운을 남기는 멘트들은 '선풍도골 운중백학'(仙風道骨 雲中白鶴)에 맞물리는 처세다. '선풍도골'이라는 말은 신선의 풍채, 도사와 같은 골격, 남달리 뛰어난 풍모를 가진 사람 또는 비범한 사람을 두고 말한다. ‘운중백학’이라는 말은 구름 속을 나는 흰 두루미라는 뜻으로 고상(高尚)한 기품을 가진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고희를 넘은 연세에 딱 어울리는 제 옷을 찾아 입은 듯한 멋진 풍모와 기품에 입이 떡 벌어진다. 멋지다는 창백한 말로는 담아지지가 않는 너무도 큰 형상에 절로 숙연해진다.

 이튿날은 추석이다. 휴대폰이 시끄럽게 울린다. 거의다 나훈아 님 상관된 콘텐츠다. 절친 가영이는 날 보고 왜 나훈아 나훈아 하는지 알겠다며 30여 년 찐팬심 고이 간직할만하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팬심 설레게 하는 표현력은 짱짱 예술이라며.

  3일 날의 스페셜 인터뷰에서 "어떤 가수로 남고 싶으신지?" 하는 질문에는  이렇게 대답한다. "유행가(流行歌), 흐를 유에 행할 행 노래 가, 유행가 가수거든. 남는 게 웃기는 거거든. '잡초'를 부른 가수, '사랑은 눈물의 씨앗'을 부른 가수, 흘러가는 노래를 부르는 가수는 흘러가면 그뿐...... 뭘로 남는다는 말 자체가 웃기는 얘기인 거. 그런 거 묻지 마소!" 구수한 사투리로 소탈하게 웃으며 풀이하는 투철한 풍류 정신에 또 한 번 감동에 감탄했다. 최고의 저력을 자랑하는 멋진 가황님.

  남편과 나는 추석 연휴 동안 두 번의 나훈아 님 공연을 시청하며 제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20대 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 속에서 달리고 달렸다. 아이돌 팬덤 무색케 한다고 엄마 정도로 열광하는 수준이면 사생팬급이라고 아들이 쇼킹해 한다. 엄마의 숨어있던 반전 모습에 당황하고 어벙벙한건 당연한 반응이다. ~ 옛날이여! 누구나 인생에 한 번씩 젊은 시절은 다 겪었으니까. 지금 얼굴의 잔주름과 조금씩 처진 양볼은 세월이 내려앉은걸 어쩔 수 없다. 하지만 팬심은 퇴색하지 않았다. 마음은 그대로 그 자리에 서 있다. 나훈아 님 보고 있으면 우리네 마음은 노랫말처럼 잠시 잠깐 청춘을 돌려받는 느낌에 열광하고 호응한다. 깊은 위로와 위안과 힐링을 받음에 열광하고 30여 년 품고 왔던 팬심에 불을 지펴 신난다. 뜻깊고 자랑스러웠던 추석 연휴였다.

  신곡 "테스 형"에 꽂혀서 줄곧 반복해 듣는다.

어쩌다가 한바탕 턱 빠지게 웃는다
그리고는 아픔을 그 웃음에 묻는다
그저 와준 오늘이 고맙기는 하여도
죽어도 오고 마는 또 내일이 두렵다
아!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아! 테스 형 소크라테스 형 사랑은 또 왜 이래
너 자신을 알라며 툭 내뱉고 간 말을
내가 어찌 알겠소 모르겠소 테스 형
울 아버지 산소에 제비꽃이 피었다
들국화도 수줍어 샛노랗게 웃는다
그저 피는 꽃들이 예쁘기는 하여도
자주 오지 못하는 날 꾸짖는 것만 같다
아! 테스 형 아프다 세상이 눈물 많은 나에게
아! 테스 형 소크라테스 형 세월은 또 왜 저래
먼저 가본 저세상 어떤 가요 테스 형
가보니까 천국은 있던 가요 테스 형
아! 테스 형 아! 테스 형 아! 테스 형 아! 테스 형
아! 테스 형 아! 테스 형 아! 테스 형 아! 테스 형

  노장의 저력으로 트로트 열풍은 계속되고 붙는 불에 기름을 부은 격으로 활활 타오른다. 힘들고 지치던 어려운 시국에 위안과 위로를 주신 가황님 감사합니다!가라앉은 일상에 강력한 한방 날려주셔 삶의 활력 되살리는 강장제 역할 톡톡히 해 주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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