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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선 Sep 28. 2020

가을의 낭만과 우울

우정의 하모니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서늘하다. 가을이 깊어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황금빛 들녘으로 드라이브 떠나면 가슴속에서 차오르는 애잔한 향수에 젖어든다. 풍성하고 풍요롭고 수확을 안겨주는 가을의 들녘을 보노라면 부모님이 그리워진다. 청정하늘의 흰구름과 선선한 바람에 그리움의 편지를 띄워본다. 

   늦가을의 예쁜 단풍은 황홀한 경지에 이끌기도 한다. 높은 하늘을 날아가는 듯한 산뜻한 마음 되어 여름내 무더위에 지치고 힘든 몸도 활개 치며 둥둥 생기가 살아난다. 살맛 난다는 것이란 이런 느낌인지도.
  나처럼 가을의 낭만을 흠씬 느끼며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을의 쓸쓸한 바람에 우수에 젖고 고요하게 스며드는 우울감에 괴로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날이 가고 해가 바뀌며 맞이하는 계절이지만 사람마다 느끼는 마음의 온도와 색채는  각양각색이다.
  지난 토요일 밤 한집안 식구가 오랜만에 거실에 모여 앉아 이런저런 시사 얘기 나누는 와중에 티브이에서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이란 노래가 흘러나왔다. 친구 월이의 18번 곡이다. 나는 솟구치는 흥을 주체 못 해 한껏 감정 살려 따라서 열창을 했다. 친구 버전으로. 아들과 남편은 웃겨 죽는다. 자신들도 따라 흉내 낸다. 가족들을 위해 요리할 때나 설거지를 할 때나 늘 흥얼흥얼 노래가 끊기질 않는 나의 일상에 간혹 흥이 폭발하면 다른 가족들도 전염시켜 동참시키는 건 늘 있는 일이다. 즐거움도 스스로 만들어내고  창의력과 열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분하고 짜증 나고 짓눌리기만 했던 일상에 찌들어있었던 나쁜 정서들을 방출시키고 양질의 에너지로 충만시켜야 한다. 소스 없는 일상은 너무 밋밋하고 지겨우니까. 요즘은 티브이만 켜면 트로트다. 불쑥불쑥 따라 부르며 한참씩 미친 듯이 끼 부리며 흥을 발산한다. 세 식구가 흥이 다분한 편이라 가끔씩 고삐 풀린 야생마처럼 달리고 나면 개운해지 건강에도 유익한 것 같다.


  이튿날 새벽에 깨어 폰을 펼쳐보니 전날 늦은 밤 월이의 음성 요청이 여러 번 있었다. 내가 성대모사를 하고 있을 때 실제로 귀가 간질간질했나 보다. 름 돋는다. 이런 못 말리는 텔레파시에 이심전심(心有灵犀一点通)이라니......
  해가 떠오르자 나는 월이 음성통화 요청을 했다. "할머니처럼 일찍 잔 거지?" 하는 친구의 푸념이다. 나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생활패턴이다. 전날 밤 불면증이 발작했는지 도저히 잠을 청할 수가  없어서 이리 뒤척 저리 뒤 척하다가 수다나 떨까 해서  음성 요청했는데 허탕이었다며 툴툴한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불편해지는 육체의 고통을 안고 사는 친구는 가을과 겨울을 유난히 싫어한다. 일단은 몸이 찬기운을 거부하고 진저리 친다. 더불어 찾아드는 우울감도 불쾌해한다. 좋아하는 계절이 봄과 여름이다. 온 우주의 기운이 따뜻해야 활개를 펴고 상쾌해한다. 친구에게 가을은 우울함이고 고통이고 아픔이다. 나에게 가을은 낭만인데. 그러는 우리는 30여 년간 친구로 지낸다. 수십 년 흘러온 세월 속에 스쳐간 숱한 인연들처럼 묻히지도 않았다. 서로 같지 않은 취향을 가졌으면서도 거부하지 않고 친구의 연을 이어가고 있다. 보통 인연은 아니다. 전생의 인연이 아니고서는 취향이 전혀 다르면서 끊기지 않고 이어져 온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다. 예를 하나 든다면 어떤 정치인들의 행태를 두고 평가하며 정반대의 경향을 보여 음성으로 두 시간이나 격하게 논쟁이 붙은 적이 있다. 우리는 서로 좌경향이니 우경향이니 목에 핏대를 세우며 예리하게 맞섰다. 결국 우리는 아무런 소득도 어느 한쪽의 굽힘도 없이 제 풀에 지쳐서 김이 새 나갔다. 기운 없이 우리가 이런 걸 왜 쟁론하냐며 허망하게 씁쓸해하며 마무리하고 말았다. 이걸 계기로 우리 사이에 정치문제는 금기사항이 되고 말았다. 아무 화제도 거리낌 없이 거론 가능한데 유독 정치문제는 아예 꺼내질 않았다.  친구사이라고 해도 견해 차이가 너무 심하면  깨질 수도 있다고 생각되었으니 30년 넘게 친구사이가 정치견해 때문에 깨진다는 건 득 보다 실이 많다고 판단되니까. 사실 나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 가끔씩 한심한 정치뉴스 보며 흥분하는 정도다. 좌우라고 말할 것도 없이 중간에 있다. 나는 늘 공자의 "중용지도"(中庸之道마땅하고 떳떳한 중용의 도리.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평범한 속에서의 진실한 도리)떠받들고 주장하는 편이다. 불편불의(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는다) 태도생활자세다. 격렬하게 똑 부러지게 표현하지 않는 법과 습관을 세월 속에서 익히고 배워냈다. 자신을 보호해내고 상처 입지 않는 가장 좋은 지혜인 거 같았다. 상처 받으며 아픈 것이 너무 싫어서 터득해낸 삶의 노하우 인지도. 실제 타고난 성격은 불같았지만 막강한 세월의 힘 앞에서는 초라하게 백기를 들게 되더라는. 각 졌던  모서리들이 다스러져 두루뭉술해지고 유연해졌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살다 보니 그렇게 되어있는 현실. 쌓인 연륜의 흔적이기도 한 듯. 역사 속 수많은 지성인들의 삶들을 엿보며 나 스스로 살아오며 온 몸으로 부딪치며 경험하며 터득한 나름의 깨달음인 것이다. 타고나게 큰 그릇도 못 되거니와 그냥 안온한 삶을 원하고 지향하니 자극적인 것들은 피하고 조용조용 주어진 삶의 테두리 안에서 충실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지극히 평범한 것인지도. 나는 나답게 사는 삶이 최상이라 생각한다. 평범하게 심플하게 내 느낌 의지대로 자연스럽게 살고 싶은 소박한 생활자세다. 자신의 삶에 최대한 충실하고자 노력한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 사색의 계절이란 걸 공감하는 점에서 우리는 하나로 일치된다. 독서와 사색을 게을리하지 않고 반듯하고 명석한 인간됨을 추구하는 생활철학에서 오는 같은 가치관 때문에 우린 오랜 세월 변함없이 묵묵히 친구로 남아 있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과 영혼에 공감대와 지적 관심사가 겹쳐지니 우정의 꽃이 피여 나는 것이다.
  비록 한 사람은 가을의 낭만을 즐기고 한 사람은 가을의 우울함에 괴로워도 서로의 낭만과 우울을 공유하며 살아간다. 사실 월이는 몸이 아주 조금의 냉기마저 감당이 안 되는 희귀병 때문에 찬기운이 감도는 가을 겨울을 육체가 먼저 거부하는 것이다. 온몸이 쑤시고 아프고 괴로우니까. 몸이 따라줘야 정서적으로 감동이든 낭만이든 제대로 느낄 수가 있는 법이다. 친구란 그런 것이다. 같음은 깔깔깔 함께 즐기고 다름은 보듬으며 위로하면서.
   가을의 낭만과 가을의 우울이 함께 어우러지며 조화로운 하모니를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의 우정처럼.

  월이는 일주일 전 피서산장과 몽골 초원에 여행 다녀온 사진을 톡방에 공유했다. "소와 말들이 끊임없이 먹어요. 주인한테 물었더니 겨울 추위를 견뎌야 하니 지방을 많이 비축해야 한다고 하네요. 그들에겐 몸속의 지방이 두터운 옷이고 이불이라고 합니다. 가만히 보니 을 자주 누면서 계속해서 먹어요. 여전엔 왜 말들과 소들이 그냥 고개를 들지 않고 있었던가 했더니 이제야 깨달았네요. 초원의 소와 말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우리가 따로 없이 땅이 침대고, 하늘이 이불이라고 합니다." 이런 문자를 곁들여서.

  나는 화답했다. 어제 찍은 따끈따끈한 포토로.

  나는 천고(天高),월이는 마비(马肥). 시공간을 뛰어넘어 천고마비를 확인하는 중이라며. 나는 일상 속의 이런 잔잔하고 소소한 우정의 호응을 좋아한다.


  "가을바람 맑고  가을 달 밝다/ 낙엽 모였다 흩어지고/  갈까마귀 쉬다가 놀란 듯날아오른다"(秋風清  秋月明   落叶聚還散  寒鴉樓復驚) 당나라 시인 이태백의 가을시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겁니다.  그때 나는 자랑스럽게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나는 내 마음 밭에 뿌려 놓은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겠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가을시는 또 다른 분위기다.

   사람마다의 마음속으로 천 개 만개의 모습으로 가을은 찾아든다.

   이 가을에 새삼스레 따뜻한 우정의 기운을 느끼며 포근하게 젖어들어본다. 세상은 삭막하고 팍팍하지만 우리는 따뜻하게 여유만만하게 함께 황혼의 길을 향해 가자고.

   낭만도 우울도 함께 공유하며.

          월이가 보내온 몽골 초원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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