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현듯 스쳐 지나간 그 생각! 인사!
둘째 놈이 질문을 했다.
"아빠! 왜 숫자는 안 끝나?"
역시나 난 극 F인데 자녀에게만큼은 극 T가 돼버렸다. 뭔가 멋진 말을 하고 싶지만 내 입에선 그저...
"9 다음 10이지? 99 다음 100이지? 그렇게 앞자리가 계속 변해서 끝나지 않아!"
아! 하고 이해한 건지 아님 모르니까 대충 대답한 건지 하고는 둘째 놈은 자기 하던 일을 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니 시간도 끝은 있었다. 끝과 동시에 시작을 하지만 끝은 분명 존재했다.
24년이 몇 시간 뒤면 끝난다. 분명 끝나지만 시간의 흐름상 25년이 시작된다. 더 작은 단위로 살펴보면 하루 역시도 24시간 이면 끝나지만 다음날의 시간이 시작된다.
'아... 이걸 설명했어야 했는데 난 왜 그렇게 무성의하게 대답했을까...'
오후에 가서 둘째 놈과 얘기 좀 해봐야겠다. 아빠도 이런 감성적인 말들을 한다고 알려줘야겠다.
두 아이는 학교에, 나는 직장에 있어야 했지만 오늘은 꿀 같은 휴무이다. 직장인에게 제일 좋은 휴무, 공짜로 돈 버는 바로 그날이다. 심지어 내 연차 소진 없이 주어지는 그 달달한 시간!
어제 야근하느라 늦게 퇴근하는 아내를 데리러 갔는데 내일 뭐 할 거냐고 물어보는 아내의 말에 자동적으로 대답이 튀어나왔다.
"카페 갈 건데? 햇살이 잘 들어오는 카페 가서 브런치 먹을 거야!"
"그럼 몇 시에 들어올 건데?"
"글쎄... 한 5시.. 6시??"
아내의 표정은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아이들의 하교시간, 첫째님이 활동보조선생님과 돌아오는 시간이 4시 반쯤 이니까 그전에 들어갈 꺼라 생각했나 보다. 하지만 난 그 이후까지 더 즐기다 간다고 하니 이 남자가 육아휴직하며 아이들에게 매우 헌신했던 그 남자가 맞는지 하는 표정이었다.
실제론 오늘 학교 땡땡이치고 놀러 가도 괜찮았다. 그러나 난 그러고 싶지 않았다. 매우 이기적인 아빠로 보일 수 있지만 어차피 내일도 쉬는 날이고 1월에 아이들과 함께할 계획들이 몇몇 있으니 나도 내 시간이 필요했다.
아내는 이 남자가 바람이 났나 하고 계속 의심하지만 한 해의 마무리를 조금은 의미 있게 하고 싶었다. 그 시간이 단 몇 시간이 안된다 해도 그간의 일들을 생각하고 정리하고 버릴 것들은 과감하게 버리는 연습도 필요하고 하다. 그런 점에서 브런치에 글 쓰는 건 참 나에겐 가장 좋은 쓰레기통이었다.
아침 햇살이 들어오는 창을 통해 커피를 마시면서 글을 쓰는 이 오전 시간이 나에게 있어선 꽤나 소중하다. 주말인 토요일 오전이 일어나기 싫지만 일어나서 커피 마시며 글 쓰는 게 좋듯이 이 공짜 휴무에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라면 역시 글 쓰기이다.
하지만 오늘은 24년 마지막이라 무슨 글을 써볼까, 어떤 의미 있는 글을 써볼까 라며 아침부터 신나게 고민하다 불현듯 지나가는 생각은 바로 인사였다.
인사... 회사의 인사팀이 지금 공석이라 생전 처음 해보는 인사업무 하는데 실수가 너무 많아 스스로에게 짜증이 났다. 주변 동료가 조금 싫은 말을 하면 짜증이 겹겹이 쌓여 변한 분노를 쏟아내며 감정을 조절하지 못했던 적도 종종 있었다.
바쁜 종무식까지 끝나고 오늘 차분히 생각하다 보니 24년을 내가 무사히 보낸 건 주변 동료들의 도움이었고 싫은 소리를 했던 동료들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 감정에만 신경 쓰다 보니 그만 실수도 많이 했었고 말로만 고맙다 고맙다 했지 뭔가 진심이 담긴 고마움을 표현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그래서 주변의 동료들에게 김사의 인사를, 미안함과 고마움의 인사를, 짜증 냈던 것에 대한 사과의 인사를 했다.
도움을 주는 동료들에 대한 인사말은 너무나 잘 나왔다. 하지만 싫어하는 동료에 대한 인사말은 도무지 써지지 않았다. 그냥 덮을까, 넘어가도 괜찮잖아 라며 멈추다가 그렇게 마음먹고 브런치 먹겠다며 아내 회사 근처 카페까지 온 수고가 아까웠다.
마음먹었으면 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며 덮으려 했던 노트북을 열고 몇 줄 적어서 보냈다.
인사 업무도 참 힘들지만 인사말... 도 참 힘들었다. 하지만 인사말을 보내고 나니 마음이 조금 후련해졌다. 상대방이 받아주고 아니고를 떠나 화내고 계속 그 감정을 누르지 못했던 것들이 실타래 풀어지듯 풀어졌다.
이만하면 24년 한 해의 마무리는 다른 한 해의 마무리 보다 좀 더 의미 있는 것 같다. 앞으로도 매년 한 해의 마무리는 인사로 정해야 할 것 같다.
이젠 오전 근무만 하고 퇴근하는, 내가 제일 사랑하고 늘 고마운 아내와 함께 차 없어서 매력이 반감된 남편이 데이트 나가야 겠다. 이러면 24년 마무리는 찐!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