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뮐러, 독일인의 사랑
첫 번째 회상.
시작이라는 것이 차라리 없었더라면 좋았을텐데. 시작을 떠올리려고 하면 금세 모든 생각과 기억이 멈춰 버리니 말이다. 우리가 어린 시절로 그리고 어린 시절에서 다시 끝없는 그 이전으로 달려가면, 시작이라는 심술궂은 놈은 자꾸 달아나서 우리의 기억이 끈질기게 뒤를 쫓아가도 결코 잡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하늘과 땅이 맞닿은 곳에 가기 위해 달려가면, 하늘은 자꾸 달아나서 언제까지나 저 위에 있고 어린아이는 결국 지쳐 그곳에 다다르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두 번째 회상
무척이나 슬픈 날이었다.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와서도 버릇없이 굴었다고 내게 야단을 치셨다. 어머니가 나를 침대에 눕히고 기도까지 해주셨지만 도무지 잠이 오지 않고 계속 같은 생각만 맴돌았다. 좋아하는 마음을 드러내면 안 되는 그 '남'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일어서기, 걷기, 말하기, 읽기를 배우지만 사랑은 배울 필요가 없다. 사랑은 생명처럼 태어날 때부터 우리 안에 있다.
우리는 서로 인사조차 하지 않는다. 답례를 받지 못하는 인사가 얼마나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인사를 나누고 손을 맞잡았던 사람과 이별하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 알기 때문이다.
꽃잎은 찢겨 시들고, 마음의 날개는 깃을 뽑히고, 마르지 않던 사랑의 샘에는 갈증만 겨우 면할 수 있는 몇 방울만 남아 죽을 것 같은 우리의 혀를 축인다. 이 몇 방울의 물을 가지고도 우리는 사랑이라 부르고 있다.
요구하는 사랑일 뿐 헌신하는 사랑이 아니다. 나의 것이 되겠느냐고 묻는 사랑일 뿐 너의 것이 되겠다고 말하는 사랑이 아니다. 이기적이고 의심하는 사랑일 뿐이다.
세 번째 회상
하지만 언젠가는 너희들과 헤어지게 되겠지. 그렇더라도 나를 까맣게 잊지는 말아 줘. 그래서 너희들 모두에게 반지 하나씩을 선물로 주려고 해. 우선은 둘째 손가락에 끼고 있다가 크면 점차 옆으로 옮겨 나중에는 새끼손가락에 껴줘. 평생 그렇게 끼고 있어야 해. 그래 줄 수 있지?
네 번째 회상
처음 보거나 듣거나 맛보는 일은 아름답고 위대하고 즐거울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새로워 우리를 놀라게 할 뿐 편안함이 없고 만족하는 데 드는 노력이 만족 자체보다 더 크다. 그러나 예전에 들었던, 멜로디조차 잘 기억나지 않는 음악을 오랜만에 들을 때 잊었던 옛 친구를 다시 만난 느낌이 든다거나, 오랜만에 드레스덴의 성모상 앞에 섰을 때 아기 예수의 무한한 시선에서 예전의 감흥을 다시 느낀다거나, 학창 시절 이후로는 신경도 쓰지 않던 꽃향기를 맡고 그때의 음식을 다시 맛볼 때, 우리는 진심으로 즐거워한다. 그래서 지금의 삶이 즐거운 것인지 낡은 회상이 즐거운 것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다섯 번째 회상
사랑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 어떤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기란 무척이나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들어. 사랑의 표현은 언제든 쉽게 꾸며낼 수 있으니까. 그래서 내 생각에는 자신이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면 사랑받고 있음도 알 수 없을 것 같아. 사랑을 깨달은 사람이라도 스스로 자신의 사랑을 믿는 만큼만 다른 사람의 사랑을 믿을 수 있는 법이지.
저자는 자신의 의견을 논증하지 않고, 뿌려진 씨 중 몇 개는 좋은 땅에 떨어져 수천 배의 열매를 맺으리라 기대하듯 그저 의견을 뿌려둘 뿐이었어. 단 한 번도 자기의 의견을 증명하려 애쓰지 않았어. 자기 의견이 진실임을 확신했기 때문에 굳이 증명이라는 형식을 쓸 필요가 없었을 거야.
일곱 번째 회상
인간은 어째서 자기 인생을 흥청망청 써 버리는가. 인간은 어째서 오늘이 마지막 날일 수도 있음을 생각지 않고, 시간을 잃는 것은 영원을 잃는 것과 같음을 모른 채, 자기가 하는 최선의 것과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움을 다음으로 미루는가.
언젠가는 꼭 호수 지방에서 여름을 보내며 워즈워스가 시에서 노래한 장소들을 일일이 찾아가, 그의 시 덕분에 도끼날을 면한 나무들을 직접 보고 싶어.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워즈워스가 노래했고 터너 같은 화가만이 그려낼 수 있었던, 저 멀리 해가 지는 광경을 바라보고 싶어.
영원을 보는 눈, 사소하고 순간적인 것을 신성한 것으로 만드는 힘
나의 입술이 그녀의 손에 키스했다.
마지막 회상
잠이라는 것이 없다면 인간은 어떻게 될까? 우리는 밤의 정령이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가는지 모른다. 밤의 정령이 우리의 눈을 감겼다가 아침에 다시 뜨게 하리라는 것을 누가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최초의 인간이 이 낯선 친구의 손에 몸을 맡겨야 했을 때, 그는 아마도 대단한 용기와 깊은 믿음이 필요했으리라.
우리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불완전한 언어가 '사랑'이라 부르는 것에 대한 진짜 이름을 찾아내야 한다.
그대의 오빠라도 좋고 아버지라도 좋고 무엇이라도 좋으리!
'무엇이라도' 되겠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이 세상은 이름이 없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무엇'에 붙일 이름을 찾아내야 한다.
자기 마음조차 이해하지 못하면서 우리는 어찌하여 모든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려 애쓰는 것일까? 자연이든 사람이든,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바로 '이해할 수 없는 것'뿐이다.
어린아이에게 왜 태어났냐고 물어봐. 들에 핀 꽃에게 왜 피었냐고 물어봐. 태양에게 왜 햇빛을 비추냐고 물어봐. 내가 너를 사랑하는 건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야.
가장 선한 것을 가장 사랑해야 한다. 쓸모의 유무, 이익과 손해, 얻음과 잃음, 명예와 불명예, 칭찬과 비난 따위를 따져서가 아니라 오직 고귀하고 선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을 두 번째 읽었다. 짧은 책이라 앉은자리에서 단숨에 끝까지 읽어냈다.
처음 이 책을 알게 된 순간을 기억한다. 밤에 가만히 앉아있으면 풀벌레 소리밖에 나지 않는 고요한 산중턱의 북스테이에서 하루를 보냈다. 몇 시간에 걸쳐 집을 가득 채운 책들을 모두 살펴보았다. 어떤 책을 읽어야 하나 행복에 겨운 고민을 했었다. 박완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양귀자의 '모순'과 함께 이 책을 골랐다. 그리고 그 밤에 세 권을 모두 다 읽었다.
그 숙소에서 보낸 시간은 정말로 영화 같았다. 주인아주머니께서 아침저녁으로 정갈한 채식 밥상을 내주시고, 하루 온종일 책에 둘러싸여 읽고 읽고 또 읽었다.
위의 문장들을 옮기면서, 처음 읽었던 그 밤에도 정우에게 같은 문장을 읽어줬었던 기억이 났다.
"이 문장 너무 아름답다. 들어봐. '어린아이에게 왜 태어났냐고 물어봐. 들에 핀 꽃에게 왜 피었냐고 물어봐. 태양에게 왜 햇빛을 비추냐고 물어봐. 내가 너를 사랑하는 건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야.'"
그렇게 말한 뒤에 나는 잠자코 '내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생각했다. 결론이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2년 만에 같은 책을 읽고, 또 같은 생각을 해본다.
내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요구하는 사랑인가 헌신하는 사랑인가? 나의 것이 되겠느냐고 묻는 사랑인가 너의 것이 되겠다고 말하는 사랑인가?
한참 동안 생각해 보았다. 까딱까딱 움직이는 내 발도 보았다가, 하늘도 올려다 보고, 내 다리에 기대 잠든 애꿎은 천둥이도 깨웠다가.
책의 다섯 번째 회상에서 마리아는 아래와 같이 말했다.
사랑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 어떤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기란 무척이나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들어. 사랑의 표현은 언제든 쉽게 꾸며낼 수 있으니까. 그래서 내 생각에는 자신이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면 사랑받고 있음도 알 수 없을 것 같아. 사랑을 깨달은 사람이라도 스스로 자신의 사랑을 믿는 만큼만 다른 사람의 사랑을 믿을 수 있는 법이지.
내가 내 사랑의 크기를 처음 깨닫게 된 건 천둥이를 통해서였다.
천둥이를 데려오기 일 년쯤 전부터 유기견을 입양하고 싶어서 이것저것 알아보고 공부하고 찾아보았지만, 정작 천둥이를 만나게 된 건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어느 주말에 유기견 입양단체 SNS에서 다른 강아지가 눈에 들어와 거리입양제에 갔었다. 그 강아지는 아직 새끼라 24시간 사람이 필요해서 1인가구에는 입양을 보내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봉사자분께서 나에게 당장 임시보호처도 구하지 못해서 보호소로 돌아갈 처지인 강아지 두 마리가 있다고, 그 강아지들을 한 번 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그리고 꾀죄죄한 작은 강아지를 내 품에 안겨주었다.
그전까지 수많은 강아지들을 안아보았지만, 글쎄,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이 아이를 여기 두고 떠나지 못하겠구나 하는 예감이 들었다. 여러 가지 입양 절차를 밟으면서 혹시라도 조건이 충분하지 않아 입양이 안 되면 어쩌나 눈물이 났다. 그렇게 얼떨결에 나에게 가족이 생겼다.
일주일 뒤에 중성화 수술을 받고 집에 돌아왔다. 평생 크게 다쳐본 적이 없어서 꿰맨 상처를 처음 봤다. 아침저녁으로 수술 부위를 소독해 주었어야 했는데 그게 얼마나 힘들던지 이틀째 되던 날 나는 엉엉 울었다. 생명을 책임진다는 게 이런 거였다니- 하는 생각에 엄청난 압박감이 나를 짓눌렀다.
그 후로 벌써 5년이 꼬박 지났네. 내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동전의 앞면이 그 뒷면을 평생 볼 수 없듯이, 나의 삶이지만 이전의 안락했던 형태는 이제 쳐다볼 수도 없는 것이 되었다.
천둥이를 만나고, 사랑에 대해 새로운 정의를 내리게 되었다. 주는 사랑의 기쁨. 내 사랑과 헌신으로 상대의 표정이 부드러워지고 마음이 열리는 것을 볼 때의 환희. 무서운 것도 내가 옆에 있으면 어쨌든 도전해 보겠다는 믿음. 이제껏 사람의 관계에서는 겪을 수 없었던 무한한 사랑.
언젠가 아이를 갖게 된다면 내게 또 다른 세상이 열릴까? 그래서 엄마가 그토록 내가 아이 낳기를 바라는 걸까? 아이의 입장에서 내가 느꼈던 건 그런 사랑은 아니었는데. 내가 엄마가 되면 무한한 사랑을 줄 수 있을까? 그럼 내 아이는 그것을 무한하다고 느낄까? 모르겠다.
나에게 사랑이란, 내가 나에게 주는 사랑이란, 내가 남에게 주는 사랑이란, 내가 남에게 받아온 사랑이란 무엇인지 되짚어보게 되어 좋았다. 그리고 아마도 몇 년 뒤면 또 이 책을 찾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