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에세이
툭하면 부정적인 감상을 담는 사람이 있다. 만사에 회의적인 시선이 있다. 세상엔 다양한 시점이 있다지만, 그러한 태도들을 옆에 두고 있자면 차가운 시선이 품은 냉기는 드라이아이스가 내뿜는 샛하얀 연기처럼 나에게로 스멀스멀 퍼져온다. 설령 내가 차가운 단상을 거부한다 한들, 비관적인 눈초리는 이윽고 내게도 얼마간 전염되어 매사를 삐딱하게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에겐 거울 뉴런이 있어 눈앞의 행동을 모방하고, 사회성을 타고난지라 타인의 감정을 툭하면 내 것인 양 이입하여 모사하기도 한다.
모든 항목엔 기준이 있다. 기준은 가늠을 위한 도구다. 현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얼마나 되는지 알기 쉽게 해 준다. 단위가 존재하는 이유다. 단위가 정한 수치에 현상은 정량적으로 계산된다. 시선에 담긴 온도 또한 기준점에 따라 더럿 갈릴 수 있다. 온도에는 몇 가지 기준이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썹씨부터, 화씨와 절대온도까지. 화씨는 썹씨에 1.8을 곱하고 32를 더해 구한다. 그리고 절대온도라는 기준엔 마이너스가 있지 않다. 가장 낮은 온도조차 0부터 시작한다. 같은 온도일지라도, 그에 따른 기준을 달리하는 것만으로도 부정은 선뜻 사라진다.
바라본 대로 보이는 법이다. 뭐든 그랬고, 여타 어느 것도 그렇다. 따뜻함은 찾아내어 해석하고 느낄 때 불현듯 다가온다. 물잔에 담긴 물의 양이 '절반이나'로, 혹은 '절반밖에'로 판별하는 건 개인의 몫이다. 바깥 기온이 누군가에겐 춥지만, 또 다른 이에겐 포근하기도 하다. 같은 것을 다르게 보는 일. 범사에 차가움을 걷어내고 온열감에 손을 짚어 보기. 영하가 사라진 공간에는 음(-)도, 마이너스도, 부정도 잦아든다. 기준점을 높여야 할 이유다. 차가움을 걷어낼 수 있도록, 다변하는 시선들 속에서 부정이 사라진 시선으로 바라보려 애쓴다.
차갑던 그들의 시선 또한 따뜻함으로 데워질 수 있을까. 열이란 자고로 평형을 추구한다. 아이스아메리카노 속 얼음이 녹아 점차 상온으로 향하고, 핫초코 속 피어나는 김이 서서히 주변 공기의 온도로 맞춰진다. 냉탕에 들어가면 체온이 그에 맞춰 낮아지고, 온탕에 입욕하면 몸이 덩달아 따뜻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혹자가 낮은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열을 빼앗기지 않으려 절대적인 온도를 견지한다. 그렇게 나를 지켜낸다. 이젠 내가 지켜낸 영상의 온도를 덥히고 데워 주변의 얼어붙은 시선마저 녹여내어 본다. 숨어있을 긍정의 방법을 함께 끄집어낸다.
툭하면 부정적인 감상을 담는 사람, 한때의 나 또한 그중 일부였다. 차갑기만 하던 나를 품어주던 주변 사람들의 손이 얼마나 시렸을지 이제와 돌이켜보면 겸연쩍다. 그러니 이제는 웬만히 긍정적인 시선을 묻히는 사람이 되려 한다. 절대온도의 색안경을 쓴다. 절대온도로 바라본 세상엔 영하가 없다, 가장 낮은 온도가 0일뿐이니까. 절대온도가 만연한 세상엔 부정이 끼어들 틈새가 없다. 긍정적 편향은 건강한 편견이 되어주리라 믿는다. 음수가 사라진 온도계가 주변으로 퍼뜨려나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