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의 기억이 선명하진 않지만, 그때의 커피 맛은 분명 썼다. 어른들이 하루에 한 잔씩은 꼭 마시던 커피 맛이 궁금해 처음 맛보았을 때, 입안 가득 퍼지던 쌉쌀함에 인상만 잔뜩 찌푸렸던 기억이 아직도 한 켠에 잔잔히 남아있다. 쓰다는 향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무렵이었고, 인위적이고 맹목적이어도 달큼하게 만들어진 것들에만 손이 갔다.
그랬던 커피를 지금은 하루에 한 잔씩은 꼭 찾는다. 없으면 괜스레 허전함을 느끼고, 때로는 원인 모를 갈증에 두세 잔을 내리 들이켠다. 기억 속 쓴맛은 지금도 여전히 잔향처럼 머물러있지만, 커피를 마신다고 해서 딱히 쓴맛을 떠올리는 건 아니다. 모든 건 그대로 일뿐인데, 별로 느껴지지 않는 쓴맛이다.
돌이켜 보면 어색한 일이다. 커가는 사이에 커피의 쓴맛이 약해지거나 한 일은 없었을 건데 말이다. 당시의 쓴맛이 그리 쓰다고 느껴지진 않는다. 가끔씩만 대면해도 됐던 어릴 적의 쓴맛이 이제는 일상에서도 매일 같이 느껴야 하는, 어쩌면 당연해진 씁쓸함이 되어버려서인 걸까. 생물이 환경에 느릿느릿 적응해 나가듯, 쓴맛에 서서히 노출되어가다 보니 어느새 부지불식 적응되어온 결과였나 싶었다.
그럼에도 쓴맛이 쓰지 않다는 건 나름의 쓸모가 있다. 예전보다 '씀'이란 감정이 조금씩 덜 두려워졌기 때문이다. 짧은 세월 내에도 커피의 쓴맛은 쓰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씁쓸한 일이 다분했으니까, 커피 속 신랄함은 그저 쌉싸름에 불과했다. 맛이 변한 게 아니라, 감각이 변모한 결과였다.
하다 보면 익숙해지고, 겪다 보면 무뎌지기 마련이다. 처음 마주한 실패는 너무나도 아프고 쓰라렸다. 세상이 끝날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좌절과 낙담에 눈이 부은 채로 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살다 보면 더 큰 실패와 아픔도 차례로 다가온다. 그로 인해 좌절 뒤에는 반드시 극복이 온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쓴맛을 느낄 때마다 미각은 조그마한 내성을 심어주고 있었다. 하루에 한 잔씩 마셨던 커피가 지금의 씁쓸함을 덜어주었듯이 말이다. 그러니 지나온 고초만큼 다가올 씁쓸함 또한 애써 두려워 않는다. 공들여 거부하진 않는다. 커피가 더 이상 쓰지 않게 된 만큼, 앞으로 겪을 쓰디쓴 경험도 차츰 무뎌져갈 테니까.
그렇지만 그 맛이 쓰다는 사실은 알 수 있을 정도만큼만 무뎌져도 되는 세상이길. 한도를 넘긴 남용은 감각마저 마비시키는 법이니, 정량만으로도 버틸 수 있는 세상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