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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현 Sep 04. 2023

건물 사이 흔들리는 꽃

과학과 에세이 사이

가끔 몸만 컸다고 느낄 때. 사소한 일들로 흔들리고 무너지려는 자신에 화가 나기도, 작은 실책으로도 낙망하는 모습에 답답해할 때. 삿된 사유나 개별적인 이유로 중심을 못 잡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세상 앞에서 한없이 위축되곤 한다. 지나가는 바람에도 흔들리던 시절은 한참 전에 끝났음에도, 철 가리지 않고 틈틈이 불어오는 외풍에 마음 한 켠이 서늘한 건 지금도 여전하기만 하다.

컸으면 큰 만큼 의연해지는 걸 무릇 당연시하는 세상이다. 가벼운 타박상에도 눈물을 보이고 늘 주위를 지키던 보호자의 보살핌이 있던 어릴 적과 달리, 우리에겐 혼곤 속을 헤맬 때조차 넘어지지 않을 의무가 있다. 공과 사를 구분 못하는 게, 감정의 뒤끝이 일상으로 넘어오는 게 어른답지 않다고 하니 늘 그렇게 나의 사건과 세상의 동작을 분립시켜야 한다. 둘은 서로에게 영향을 줘선 안 되는 독립변수라니까. 

아는 것이 많아지고 할 수 있는 게 늘어갈수록 시험에 들게 하는 요인은 한없이 늘어난다. 몸집이 커지고 어른에 다가간다는 건 인간관계부터 감정 관리, 생계, 업무, 가정, 일상까지 각종 책임 소재가 늘어남과 합일한다. 그럼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가야 하는 불문율은 언제나 굳건하기에, 때때로 갈피를 못잡는 자신에게 연민 섞인 비난을 하며 버텨 보기도 한다. 혹자는 천 번은 흔들려야 꽃이 핀다고 하니 말이다. 흔들림의 실체를 알기 전까진 되도록이면 숨기며 지내던 이유였다. 허나 그만한 인내가 부재한 탓이었나, 현실 속에선 열 번의 흔들림만으로도 힘주었던 다리가 금세 풀리고 말았다.

시련의 일련은 갈수록 늘어날 텐데, 그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사전에 방지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다. 외풍은 늘 한결같을 순 없다. 훈풍이 불어오기도, 선풍이 닥쳐오기도 한다. 존재의 예상은 할 수 있어도 시기의 예측은 해낼 수 없다. 그러니 일량 받아들여 보기로 한다. 건물의 층고가 그렇다. 오를수록 흔들림은 비례하며, 아득히 높아질수록 빌딩이 흔드는 진동은 격해진다. 커져가는 몸집만큼 버텨내야 할 외력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흔들리면서 되려 안정을 되찾는다. 한 틈의 흔들림조차 고려되지 않은 설계는 외벽에 금을 남긴다. 한 번 새겨진 금은 이내 내벽을 파고들어 곳곳에 상흔을 새긴다. 늘어난 상흔은 누적되어 결국엔 무너짐을 부른다. 흔들림이란 결국 높다란 존재에겐 안전을 위한 역학적 설계였다.

일생 ‘무언가’를 이루려 노력한다. 고생하고 버텨낸다. 그러다 숱한 외풍이 닥친다. 흔들림은 그 선행 과정이자 전제 조건으로서 거듭 나타난다. 층고가 쌓일수록 더 많이 흔들리는 고층 빌딩처럼, 높아져 가면 그만큼 흔드는 요소가 늘어나기 마련이다. 물리 법칙은 여느 누구에게나 어느 물체에나 동등하다. 어디에 있든 어떤 모습이든 관계없다. 오를수록 에너지를 가지고, 에너지를 가질수록 불안정은 커져간다. 위세에는 합당한 위기가 따른다. 흔들림은 그런 위태를 위한 과정이자 정온을 위한 현상에 가깝다. 중심잡기라는 일련의 행위들이 쌓여 안정을 쌓아가는 것. 갈대처럼 여러 인자를 버텨내는 일. 오름에 있어서 동반되는 흔들림이 필요하다.

마천루마다 고유의 진동수가 있다. 재료와 높이, 넓이와 구조가 다름에 저마다 고유한 흔들림을 가진다. 그러니 나만 나부끼는 것 같단 생각도 무용하다. 제각각인 개인들 또한 특유의 흔들림을 지닌다. 각자의 진동에는 시기도, 범위도, 크기도 달리한다. 흔들리는 방식도, 떨리는 과정도, 털어내는 방법도 일체 다를 테지만, 제 나름대로 외압에 맞서는 법을 터득해 간다. 어떤 형태든 상관없다. 주목해야 하는 건 시시각각 몰아드는 빌딩풍을 각자의 떨림으로 버텨내는 건물들처럼 떨림 그 자체에 있다. 외풍에 힘겹다면 떨림을 기억한다. 그건 성장과 굳건함을 토대로 늘어날 내력의 초석이 될 테니 말이다.

흔들림에 무심해지는 방법. 그건 되려 흔들림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 다가온다. 공포와 불안은 정체를 모를 때 커져간다. 본질을 아는 순간 초조함은 사위어 간다. 커져가며 흔들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자, 성숙에 동반된 과정이다. 새로움을 잔뜩 안고 무언갈 시작하기 직전, 몸을 휘감던 전율과 떨림을 경험해 봤을 테다. 한 차례의 긴장을 겪어내면 한 폭의 발돋움을 어렴풋 느껴내기도 했을 거고. 무수한 흔들림을 겪어내야 하는 이유는 다름없다. 몸을 이루는 원자들은 떨리면서 안정을 찾고, 몸 담고 있는 건축물과 지축마저 여러 차례 떨어대며 중심을 잡는다. 견지해야 할 태도는 흔들리지 않는 게 아니라 잘 흔들리는 법이다. 여유는 정적에서 오지 않는다. 다단이 반복될 숱한 떨림을 인지할 때 찾아오는 법이다.

높은 곳을 향해 쌓여갈수록, 위치 에너지는 비례한다. 떨림은 높아지는 과정을 버티는 일이자, 무사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떨림에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다. 가만히 우직하게, 무감히 버티는 게 능사는 아니었음을 알려준다. 얇디얇은 갈대가 제 몸의 몇 배나 되는 풍압을 견디는 원리이기도 하다. 높이 올라온 만큼 역학적으로 진동은 동반되기 마련이다. 그런 흔들림을 보고 나약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건, 되려 안전한 설계다. 

억지로 버텨낼 필요 없고, 쉽사리 낙심할 것도 없다. 건물 사이에 피어난 꽃은, 빌딩풍에 맞춰 흔들린다. 흔들림을 머금은 꽃은 유난히 질긴 법이다. 넘어뜨린다면 잠시 앉았다 다시 일어나면 될 일이다. 밀어낸다면 일순 흔들렸다 다시 중심을 잡으면 될 일이고. 고초가 지나가면 또 한 차례 자라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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