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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행 Aug 11. 2023

병가를 썼다

이년차는 힘들다

미국은 7월부터 한 학년, academic year가 시작한다. 그래서인지 반쯤 직장이고 반쯤 학교인 [사실상 직장인데 배우기도 해야하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경우에도 7월이 새로운 연차로 진급하는 시간! 나는 불과 6주 전 무사히 여기서 인턴이라고 부르는 정신과 일년차를 마치고, 이년차 레지던트가 됐다, 짝짝! 레지던트 지원 전 인턴 1년을 따로 하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미국은 레지던트 합격 이후 어느 과가 됐든 첫 한해를 인턴이라고 부른다. 정신과의 경우 인턴, 즉 정신과 일년차의 스케줄은 대략 정신과 절반, 다른과ㅡ내과, 신경과, 응급실 등의 관련과ㅡ 절반과 같은 식이다. 사실상 정신과가 백프로가 되는 진정한 시작은 다름 아닌 이년차인 셈. 윗년차 친구들이 이년차의 좋은 점만 말해주며 쉬쉬하는 바람에 깜빡 속았는데 작년보다 훨씬 힘들다. 너무 힘들어서 놀랐다. 처음 미국 병원에 똑 떨어져 홀로 폭풍 속에 흔들리는 찻잔 같았던 작년 이맘때에 비해 나보기에도 남보기에도 더 잘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친구들에게 되물어보니 사실 자기들 생각에 가장 힘든 연차가 이년차란다.


우선 정신과 의사로서 무언가를 급격하게 쌓아가는 혹은 쌓아가야하는 시기임과 동시에, 미래의 진로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해야 하고 [미국은 정신과 내의 세부 분과가 잘 구분돼있다. 그중 예컨대 가장 빨리 지원하는 소아정신과 펠로우십은 이년차 중반에 지원을 결정한다], 이제 천둥 벌거숭이 일년차를 벗어났으니 어느 로테이션을 가든 뭔가 좀 잘 알기를 기대받곤 하며, 바쁜 와중에 의대생들도 늘상 끼고 가르쳐야하는 데다가 [의대생들 가르치는 걸 참 좋아하는 데도 시간이 쓰이는 건 사실이다] 결정적으로! 정신과 응급실 당직! 풀타임 근무 후에 밤 열두시까지 정신과 응급실에서 추가 근무를 해야하는 그 의무가 이년차부터 생긴다. 엉엉. 나중에 얘기하겠지만 정신과 응급실, 와일드함의 끝판왕이다.


자세한 이년차 얘기는 다른 데서 하도록 하고, 오늘의 주제는 그래서 병이 났다는 것. 이년차 첫 로테이션이었던 노인정신의학 병동 근무를 나름 의미있게 마쳤고 [강렬하고 힘들고 보람있었던 시간이었다], 그 와중에 7월에는 한국에서 온 의대생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기도 했고, 그 와중에 응급실 당직을 상당수 처리하기도 했고, 그 와중에 이년차가 되어 첫 상담 환자 케이스를 받기도 했고, 그 와중에 레지던트 끝나면 어디서 뭐하고 (?) 살지 답 없는 상상도 빡세게 하고, 그리고 결국 그 모든 것을 기념하고 긴장을 풀기 위해 주말 토론토 여행을 감행했다가 [한국 포차가 반가와 남편과 학부 때도 잘 안하던 1차, 2차를 뛰었다가] 아마도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몸살이 났다. 일요일엔 콧물과 오한 월요일엔 오한과 열 화요일엔 나아지는가 싶다가 수요일 아침에 눈을 뜨니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병가 쓴다고 이메일 보내야할 사람이 산더미인 터라 눈치 주는 사람도 없이 눈치 보며 병가를 냈고, 하루 짜리 동면에 들어갔다. 모든 걸 일시정지하고 잠을 오래 자고 넷플릭스와 유투브를 몰아보다가 살짝 살만해져서 저녁 나절 혼자 자전거 타고 공원에 가서 농구를 하고 이웃 주민과 담소도 나누고 화분에 자라던 깻잎을 따다 밥을 먹었다. 해가 좋았다. 바람도 좋았다. 내려가는 마음의 긴장을 보며 그간 마음이 얼마나 단단히 죄어있었는지를 새삼 느꼈다. 이것저것을 동시에 신경 쓰고 이것저것에 구멍나지 않게 애쓰느라 지쳤던 것 같다. 한 번 동면에 들어갔더니 당최 사람 만나기도 싫고 밀려드는 일 처리하기도 싫고 이메일은 거들떠보기도 싫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혼자 있고 싶단 생각만 든다. 아직도 다소 그렇다. 그러다가 다시 조금 외로워지는 걸 보니 이제 나아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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