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온전히 인식하지 못한 채 시간과 삶이 흘러간다. 핑계라면 현대 사회의 수많은, 미디어를 포함한, '외부의 활력과 즐거움.' 에리히프롬이 말한 대로 라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은 활력, 본인 고유의 생명력을 거세시키고서 그저 남이 즐거운 것을 봄으로써 자신이 생명력이 있다고 믿는 그런 현대인의 무기력에, 또 소비하고 소비되는 존재로서의 자신에 젖어있었나 보다 한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종종 내가 바라보는 혹은 바라는 나의 현재나 미래와 괴리가 있을 때가 있어서 일하는 순간 집중하는 것 말고는 스스로에게 새삼스레 인식되는 일이 없다. 한 대학 병원의 정신과 전공의인 나는 어느 병동에서 일하는 지에 따라 일과나 일상의 결이 많이 달라지지만, 지난 일주일을 돌아보자면 다음과 같다. 지금나는 정신과 환자들을 위한 내과 병동에서 내과 주치의로 일한다. 나의 하루는 새벽 일찍 힘겹게 일어나 햇빛을 모방한 1만 lux의 인공 조명을 켜고 그러고도 한참을 뒤척인 후 앱으로 차 시동을 켜놓고 아끼는 머신으로 커피를 내리고 요거트를 도시락 통에 담아 그래놀라를 잠기지 않게 부어놓고 허둥지둥 출근해 밤샘 근무를 한 동료에게 밤 사이 내 환자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해 인계를 받고 작은 인턴 오피스에 가서 환자 파악을 하는 일로 시작된다. 새로 나온 피검사 결과도 훑어보고, 혈압이나 혈당에 문제가 있는지도 살피고, 간호사들이 남긴 기록도 살피고, 열은 나지 않았는지, 약은 처방한 대로 다 나갔는지, 환자에 따라서는 행동 문제이나 안전 문제는 없었는지 등등을 살피고 짧은 '회진 전 회진'을 돈다. 교수님이 오시면 간단히 환자마다 어떤 이슈가 있었는지를 중요한 내용을 공유하고 교수님과 같이 다시 내 환자들을 보러 간다. 교수님과는 오늘 뭘할지에 대해서도 얘기하는데, 약을 조정할 건 없는지, 다른 과에 협진 요청을 해야할 건 없는지(참고로 협진은 낮 12시 전에 하는 게 매너다) 등등에 대해 얘기를 하고, 필요한 오더나 다른 과에 페이지하기 (미국 병원에 아직 있는 삐삐 시스템) 등등을 한다. 뭐 매일 매일 이슈가 달라서 이 일과의 포맷은 유사할 지언정 자세한 결들은 달라진다. 얼마 전엔 신장 문제가 있어 투석을 받는 환자가 다리가 안 좋아서 MRI를 조영제 넣고 꼭 찍어야 할 일이 생겼는데, 이 조영제가 신장에 또 부담이 된다, 이 경우 MRI 스케줄과 투석실 스케줄이 연달아 잡혀야 되는데, MRI는 MRI대로 대기가 빡세고, 투석실은 투석실대로 연결이 어렵고, 환자는 MRI 찍으러 갔다가 통증이 심해 못찍겠다고 나오고, 그것 때문에 미리 연달아 잡힌 투석 스케줄이 또 캔슬 되어서, 그걸 서로 조율하느라 MRI실에 전화해서 이 환자 사진 꼭 찍어야 한다고 말하고, 투석실에 전화해서 MRI 이 시간으로 잡았다고 투석 잡아달라고 부탁하고 결국 스케줄 컨펌해서 환자에게 설명하고 등등의 일을 했다. 뭐 이렇게 보니 굉장히 비의학적인 일에 시간을 다 쓴 것 같지만, 사실 병원의 주치의 일은 결국 환자건 스태프 건 죄다 사람 대하는 일이기 때문에, 꼭 의학적인 일만을 포함하진 않는 게 당연지사다. 여하튼 그러다 종종 공부도 한다. 이를 테면 나는 얼마전 흔히 처방되는 항불안제 금단 현상으로 굉장히 독특한 행동을 하는 환자와 함께 일하게 됐는데 마침 발표를 해야할 일이 있어 그 약의 금단 현상에 대해서 공부해 발표하게 됐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미국 의사시험의 마지막 스텝인 스텝3, 주로 1년차 들이 보는 시험을 본다. 물론 공부 따위는 미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짬이 나면 그 시험 공부도 형식적으로는 해야한다.
초저녁 퇴근하여 집에 오면 요새는 혼자 너무나 열성적으로 요리를 한다. 나다움을 일깨우고 스스로를 돌보는 필사의 의지. 강된장도 하고 1키로 돼지고기 목살을 사서 (미국에선 가장 작은 단위가 남다르다...) 셀프 컷팅해서 돼지목살 김치찌개도 하고, 고기 구워서 쌈 싸먹고, 그리고 치우고, 배가 한 껏 불러서는 위에 말한 시험 때문에 공부를 하려면 집 밖에 나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소파에서 유튜브를 보다가 선잠이 든다. 한 10시쯤 아 잠들었네 싶어서 일어나서 씻고 다시 잔다.
흘러가는 하루, 굳이 기억조차 하지 않을 하루를 기록해보았다. 그 이유는 이러한 일상들 이후 나는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현재의 직업에서 의미를 발견하지만, 인식 없이 일상을 흘려보내는 것을 보면 내 존재의 바람은 여전히 붕 떠 있나 한다. 붕 떠 흘러간다. 천직 같은 것에 대한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내 존재가 가는 방향은 늘 궁금하고, 가끔은 불안하다. 다음 주엔 발표가 있고, 다음 달엔 시험이 있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